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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May 22. 2020

<사바하> - 도를 아십니까

2019. 03. 07.

고작 한 번밖에 안 봤는데 비판을 한다니 참으로 용기가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각 잡고 따져볼 만큼 기대치를 충족시켜준 작품도 아닌데 말이다. 이 영화는 종교에 관한 내용이다. 종교인들도 당연 나온다. 사후 이루어질 구원이든 당장 눈앞의 살림이든, 무언가 기대를 품고 사는 사람들.



주인공 박웅재 목사는 영업직이다. 종교인이면서 영업을 뛴다. <극동종교문제연구소> 간판을 걸고. 자기수양과 순수주의를 표방하는 신앙의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학생들 인질로 붙잡은 신학대 특강(용서할 수 없다.)에서 스크린에다 은행별 계좌번호를 다섯 개나 띄워놓고 구걸까지 불사하는 낯짝의 두께를 헤아릴 수 없는 속세파다. 영업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건 영업이 아니다. 그냥 구걸이지 그게 무슨 영업인가. 진짜 영업은 불교의 한 종파를 향한다. 거기서 옴진리교가 어쩌네 저쩌네 열과 성을 다해 까뒤집은 치아 임플란트값으로 후원 약속에 성공한다. 그는 대체 왜 이러고 사는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쓰는지는 적나라하다. 낡아빠진 <극동종교문제연구소>에는 공기청정기도 없고 난방비도 후달리는데 정작 연구소 앞으로 굴러오는 자동차는 BMW에 목사 특유의 단정한 옷은 버버리 코트로 가렸다. 속세를 두른 몸에 달걀물을 맞고도 코트부터 걱정한다. 이때만큼은 화난 이자성이 된다. 달걀 투척을 가방으로 막던 걸 보면 가방은 싼 걸 들고 다니나보다. 아무튼, 박웅재 목사란 생각보다 흔해빠졌다. 그는 이야기 후반부에 진정한 구도자로 교화되어 각성할 것이다. 혹은 아마도 혼돈의 극치까지 전개될 이야기의 중심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끝이 날 수도 있다. 어쨌건 박웅재 목사는 주인공이니까, 극복하거나 파멸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만큼 완성된 존재는 아닌 것 같으니까. 종교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그가 신앙을 되찾는 일은 과연 그에게 있어 어떤 역경의 극복일까, 아니면 또다른 신앙, 니힐리즘의 파멸일까. 허무주의라고 해도 될 걸 그냥 한 번 니힐리즘이라고 해본다. 그리고 그는 왜 진정으로 신을 위해 살지 않는가.



두 번째 주인공 정나한은 뭔가 이상하다. 등장부터 꽤 전개가 흐르기까지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유병재 머리스타일에 시종일관 존댓말을 구사하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멍한 눈빛에 말수도 적다. 하지만 식사는 복스럽게 하고 탈색도 할 줄 안다. 뿌리염색 할 줄은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도 모른다. 눈꺼풀 닫는 0.1초 새에 백 퍼센트 가위가 눌릴 법한 심란한 방에서 잠을 청하다가 정체불명 영혼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가 차승원이었다면 굴삭기로 덤벼보기라도 했을 텐데 안타깝게 영혼은 쪽수가 많으며 그의 멘탈도 그리 정정한 것 같진 않다. 심지어는 어떤 여자가 귀에다 대고 일어나야지, 한다. 정나한은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난다. 성능 좋은 알람이다. 이 알람이 아는 사람 영혼이라면 무서울 것이고, 모르는 사람 영혼이라면 정말이지 더 무서울 것이다. 이런 정신병리적인 인생이 힘들었던 모양인지 정나한은 같은 종교에 속한 김철진이라는 인물에게 죽으라고 종용한다. <김철수씨 이야기>가 생각난다. 민주항쟁 도중 투옥된 대학생 무리 중 한 명이 골몰하다 이렇게 말한다. 죽으십쇼, 여기서 한 명 죽으면 이거(운동) 분명 성공합니다. 정확하진 않은데 대충 이런 취지였다. 그러다 도저히 죽을 수는 없었는지(당연하지만) 제비뽑기로 결정하자고 한다. 충격적인가? 충격적이다.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을 제비뽑기로 정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보다, 그런 짓까지 하게 만든 절박한 시대상이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웠다. <사바하>의 이 장면은 다른 의미로 무겁다. 정나한은 김철진에게 엄마 밥 먹더니 기강이 해이해졌구나. 죽으렴. 할 만큼 스스로를 정당하다 여기고 있으면서 김철진도 그 요구를 불만 없이 수행할 만큼 간절한 상태인데 그 배경이 바로 종교라는 거다. 이 종교는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종교다. 세간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가졌다. 그리고 질서의 중심에는 정나한이 있는데 나중 가면 그도 누군가의 수행자에 불과하다. 사창가(참나!)에서 일하는 모친과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부친 아래 힘들게 커서 소년원으로 들어온, 그러다 세뇌당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게 된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

지겹고 우습다.



세 번째, 혹은 첫번째 주인공 이금화는 무신론자다. 그가 무신론자가 되고 만 계기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선 그의 태생부터 살펴봐야 한다. 웬 Night shift를 까먹고 안 끈 것 같은 황사 낀 하늘에 염소떼가 불길하게 합창을 하고, 모친의 몸에 잉태된 쌍둥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다리를 갉아먹는다. 먹는 쪽이 언니고 먹히는 쪽이 동생이란다. 태아는 이도 없는데 어떻게 뜯어 먹었나 모르겠다. 분명 평범한 존재는 아니다. 이 영화 장르로 봤을 때 그냥 애기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다보면 어느새 쌍둥이가 태어난다. 태어나는데 문제가 있다. 동생은 언니 때문에 다리를 다쳤고, 언니는 내가 다리 먹어서 미안해 라고 할 기회조차 잃었다. 온몸이 털 투성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산파는 이런 애들은 일찍 죽을 것이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어쩌면 지나치게 오래 살았고 이름도 없이 갇혀 지낸다. 이 뒷바라지가 분명 수월하진 않았겠지만 생각보다 더 수월하지 않았는지 방방곡곡 이사를 다닌다. 모친은 출산 후 일주일 뒤에 사망, 부친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을 매 자살한 지 오래다. 조부모님은 부친의 죽음을 사고사였다고 금화에게 말해준다. 손녀를 사랑했나보다.

하지만 할머니는 상당히 당황스럽게 군다. 금화를 별로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 신앙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건 기독교식 신앙이다. 그런데 그걸 정말 믿어서라기보다는 뭐라도 도와주소서 하고 있다. 사격게임에서 딱총 하나가 아니고 산탄총을 갈겨대는 셈이다. 올해 열여섯 살인 금화는 사춘기라 이런 가정환경을 버티기 어렵다. 사춘기가 아니라도 어렵겠다. 회복할 수 없는 자기 오른다리도, 무력한 조부도, 광적인 조모도, 십자가 붙은 철문 너머 그것도. 입에서 왱알왱알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는 방언인지 뭔지처럼, 금화는 자기 자신을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이야기 내내 버틴다. 희망이 있어야 기대를 하는데 금화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 기대도 없고, 믿음도 없고, 믿음이 없으니 무신론자가 됐다. "그거 알아요? 희망은 원래 절망이었다는 거." 따위 대사도 사치에 불과하다. 금화는 누르고 버티고 참는다. 참고 참고 참다가 나중에는 폭발하고 만다. 그리고 그 폭발은 독특한 형태로 소강당한다.



주인공 셋 다 종교라는 이름의 믿음을 다르게 대하는 중이다. 박웅재는 신앙을 빼앗겼다. 친구 이야기인 척 속여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자기만의 고통스런 역사 안에서, 자신이 그토록 매여 살던 "신의 뜻이었다." 한 마디에 신념까지 뺏겨버렸다.

정나한은 종교의 충실한 개가 되어 산다. 그러나 그에게 안식이란 없다. 자신이 아니라 신을 위한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인지 뭔지 긴가민가한 것을 쥐고 있다. 누가 그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빼앗은 것일까? 자신의 구원보다 신의 구제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종교인일까? 그렇다면 그의 종교는 무엇일까? 그에게는 신도로서의 정체성이 없다.

이금화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죽어가는 가축들도 밤마다 울리는 울음소리도 잔반을 비벼 만든 개밥을 뭉갤 때보다 현실적이지 않다. 금화는 현실주의자다. 무신론에서 이성을 찾았고, 그랬기 때문에 현실을 찾아 나스 틴트를 바르고 짐을 싸들고 가출을 시도한다. 그에게는 신앙이 없다.



모두들 결핍적이다. 인간이야 늘 그렇지만, 종교를 믿었다가 냉담자에 가까워진 인물도 종교에 심취한 인물도 종교에 전연 정이 없는 사람도 모두 부족하게 산다. 그건 그들의 태도가 아니라 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들은 신을 각자 다르게 대하지만, 신은 그들을 똑같이 대한다.



여기서 질문할 수 있다. 신이란? 인격체인가 비인격체인가, 존재인가 의식인가, 자연인가 인물인가, 유일한가 다수인가, 존재한다면 존재 이유는 무엇이고 세상을 이 꼬라지로 만들어 놓고도 책임지지 않는 그 무책임한 행태의 일체 목적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의심을 하고 믿음이 깨진다. 박웅재는 한 번 믿음이 깨졌었다. 다름아닌 신의 뜻 때문이다. 종교 분쟁이라 일컬어지는 비극에서 말미암은 피로감을 그는 줄곧 갖고 산다. 그래서 질문할 수 있다. 신이 우리한테 관심이 있긴 할까? 주님 어디 계세요? 기억력은 괜찮으신지. 꼬막을 먹으면 귀가 좋아진댑니다. 그거나 드시고 기도 좀 들어주시지요. 속지 않는 자가 속는다. 박웅재는 신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의심하면서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다.

정나한도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 지역 주님이 하라시는 대로 99년생 여자아이들만 묶어 죽인다. 근데 왜 여자아이일까. 뭔가 이런 포지션은 여자애가 해야 할 것 같아서 금화 역을 여자아이로 설정했는데, 아무래도 좀 부족해보였나보다. 어쨌든, 그렇게 살다 문득 시쳇말로 현자타임이 왔다. 유년시절 사창가(참나!) 지내던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자장가를, 살해규칙 범주에 속하는 여자애의 숨은 형제로부터 듣는데 그 형제가 굉장히 요상하다. 털투성이에 뱀까지 다루는데 사람 소름 끼치게 만들고, 나중 가니 온 몸의 털을 깨끗이 벗은 채 부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자기 이름이 상당한 스포일러였다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챘어야 했다. 거기서 충격을 금할 수 없는 콧노래자랑이 끝난 뒤에 정나한은 몹시 흔들린다. 그 자장가가 대중적인가보다 정도로 넘길 여력이 없는 멘탈 때문에 정나한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 클라이맥스가 <곡성>에서는 전개상 두 번째로 관객과의 시시비비를 겨루는 소통의 장이 된다. 첫 번째는 왜구가 산속에서 무명과 추격전을 벌이던 장면이다. 왜구는 예수인가, 악마인가? <사바하>에 육손이 있다면 <곡성>에는 성흔이 있는데, '<곡성>의 왜구처럼 이 언니도 육손을 들이밀며 이것이 증거이니라 한다. 언니는 부처인가, 악귀인가? 왜 하필 여기서 오늘 2차를 찍은 <캡틴 마블>의 "I have nothing to prove to you." 가 생각이 나는지. 아무튼,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정나한은 당장에 김제석의 육손을 확인하러 녹야원으로 간다. 사실 여기서 이미 믿고 싶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완벽하게 믿었다면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무의식중에 믿기 싫어졌던 것이다. 슬슬 심란한 잠자리를 해소하고 엄마 asmr이나 들으며 편하게 잠들고 싶어졌나보지. 정나한은 스스로 신앙을 버린다. 그 대가는, 어울리지만 컸다.

이금화는 마지막으로 언니에게 줄 식사를 만들고 거기다 기막힌 조미료를 넣는다. 농약 조미료다. 그리고 나스 펜슬립을 바르고 조부모님 돈 들은 서랍을 털고 짐을 챙겨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언니에게 돌아가 언니가 뜯어먹은 다리로 언니를 죽일 밥그릇을 걷어 차버린다. 금화는 갑자기 믿음을 찾았다. 언니가 살아도 되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이걸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부른다. 언니의 생명을 존중하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니까 목사며 권사며 수녀며 이금화의 조모까지 상당수가 크리스천인데 정작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모티브는 불교에서 나왔다. 작중 등장하는 사슴동산조차 불교에서 파생됐다. 이게 성공한 비빔밥이든 실패한 비빔밥이든 신도들은 같은

방향을 본다. 믿음에의 해명,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증명이다. 구원받으리라는 믿음. 이를 위해서는 한층 고차원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내가 믿는 상대가 나를 구원시켜줄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믿음이다. 박웅재와 정나한은 배반당했다. 그들은 각자 예수와 김제석이라는 유일신들을 섬긴다. 이금화는 어떤가? 그가 영향을 받는 언니의 존재는 불교적이다. 불교는 부처를 섬기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믿는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는다. 결국 금화는 자신을 믿기 시작했다. 언니가 살아가야 한다는 자기의 확신을 믿었다. 그래서 죽는 게 두렵지 않다 말하는 와중에도 정나한에게 부탁한다. 언니를 죽여서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게 해달라고. 이게 그냥 듣기에는 감동적인데 불교 입장에서 보면 참 무서운 말이다. 번뇌하는 자만이 윤회한다. 금화는 언니의 존재 자체가 업보라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 말하는 셈이다.



이 말에 윤회적인 의미를 찾든 말든 영화 전반적으로 불교 색채가 강하다. 그런데 배경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각자 다른 구도자들이 같은 혼란을 겪는다. 믿어야 하나. 믿어야 하는데 진리가 나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래서 괴롭다. 믿음의 안식과 불신의 고통이 말미암은 간극이 바로 믿는 자들의 숙명이다. 아마 이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순교한 신도의 내러티브 같은 것 말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농약을 넣은 개밥을 언니에게 줬다가 도로 걷어차버린 금화의 행동이 '모성'으로서 발현된 것이며 그 암시가 생리혈 장면이라는 감독의 이야기는 아마 감독 스스로도 자기가 뭘 만드는지 잘 모르고 만든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관객도 이게 당최 뭔 내용인가 몰라도 괜찮지 않을까?



작품 내에서 불교신화적 장치가 상당부분 등장하는데(출산 후 일주일이 지나 사망한 모친, 코끼리, 육손 etc) 대개 찾아보면 나오는 것들이니 별로 감흥은 없다. 그보다 이야기의 탐험자인 박웅재나 이야기 객체 수준에 머무른 이금화를 차치하고 작중에서 드러나는 정나한의 취급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야기 마지막에 그는 김제석이라는 악을 품고 제 한 몸 바쳐 희생한다. 물귀신으로 끌려 들어간 유지태는 내가 배우 얼굴을 잘 몰라서 존재가 스포일러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스포일러 없이 보았다. 유지태 김제석은 생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야기 첫 장면부터 하늘에 뜬 두 태아, 하늘이자 신이자 진리이자 운명이 태어나야 마땅한 존재들을 잉태시키고 그로부터 태어났어야 할 존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 다리를 뜯어먹는 일을 한다. 바로 그 뜯어먹는 쪽과 천적이다. 이 천적을 찾으려고 그간 무수한 99년생 여자아이들을 골라 죽였는데 그걸 정나한이 했다. 정나한은 사창가(참나~)에서 부모 같지 않은 부모 아래 자라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가 김제석을 만난다. 거기서 처음으로 자기 앞에 동등하게 무릎을 꿇는 인간으로서의 김제석을 보고 감명받아 따르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게 진짜 김제석이 아니었다는 거다. 문이 열린 순간 바라본 눈을 구원자의 눈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착각에 불과하고, 그건 광신도의 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맹목성에 매료된 셈이다. 여기까지 그는 피해자였다. 부친을 죽였다는 점에서 가까이 보면 가해자지만 멀리 보면 피해자다. 아직까지는.

이 피해자성을 여아 연쇄살인까지 끌어와서는 안 된다. 종교적 세뇌는 면죄부로서 한참 부족하다. 김제석이 자기 좋자고, 정나한이 김제석 좋자고 이용당한 게 아니다. 정나한도 김제석을 이용했다. 김제석을 도우면 뭐가 좋은가? 정나한도 구원받는다. 이러나 저러나 둘 다 이기심을 기저로 행동했던 거다. 그렇다고 '죽일 만해서 죽였다'에 부합하는 에너지가 <사바하> 안에 있을까? 감독이 그걸 해결하지 못해 이 사단이 났다. 경찰서 게시판에 빼곡히 붙어 있던 피해자들은 김제석 때문에 개죽음 당했다. 김제석은 개새끼다. 정나한은 김제석 때문에 그 일을 했다. 정나한도 개새끼다. 그런데 정나한은 이제껏 살인하는 데 사용한 끈으로 김제석의 목을 조르며 네 목이 백 개라도 모자라다는 폭풍간지 명대사를 날리며 차를 전복시킨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김제석 목 백 개보다는 김제석 목 오십 개+정나한 목 오십 개여야 수지가 맞는다. 둘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정나한 목 오십 개를 훔쳐갔나? 다름아닌 그의 모친이다. 모친이 들려준 자장가를 언니 미륵이 들려주면서 그의 안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아마도 인간성 그 비슷한 걸 상기시켰기 때문에 김철진 보고 죽으라던 정나한은 그 시간부로 사라진다. 노래란 참 얼마나 대단한가. 주말 강의 때문에 기분이 더러운 내가 <Wonderwall>을 한번 연주하면 구원받는 것처럼 정나한도 그랬는지 모른다. 그럼 나도 아라한인지? 결국 정나한에게 필요했던 믿음은 불로불사 구원자 김제석따위가 아니라 가족애의 충족, 사랑, 다시 말해 사람사이였던 모양이다. 이야기 전반이 신을 좇는 인간들 이야기니까. 그런데 여자애들 몸에 팥알 수십 개와 부적 몇 장을 처넣을 때는 그다지 그런 게 필요가 없었나보다. 결국 악귀를 등신불 만드는 데 성공한 정나한은 춥다는 한 마디와 함께 박웅재의 버버리 코트 아래 잠든다. 그는 어디로 가는가. 그는 정나한이어서는 안 된다. 아라한이 되면 안 된다. 작중 드러난 종교색중 기독교식 지옥에 가든가 불교식 지옥에 가야 한다. 기독교보다 불교를 그나마 더 잘 아는 나는, 그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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