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5. 30.
당신 작품에서는 자신감이 보인다. 언제까지고 가난 스릴러의 절대적인 관찰자로서 있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말이다.
방배동에 아파트가 있는 유구한 예술가 집안의 부르주아 감독은 자꾸 가난에 기생하려 든다. 요즘은 박완서 작가 인용문구가 눈에 자주 띈다. '가난마저 훔쳐간다'. '가난 포르노'. 가난이 잘 팔려서 다들 그 구질구질한 지하철 냄새를 가져다 쓰는 걸까? 아니다. 가난은 잘 팔리지 않는다. 세련된 것들이 팔린다. 명문대졸에 무슨무슨 그룹 부회장을 젊은 나이에 역임하고 있는 잘생긴 남성과 그를 보필하는 스타일 좋은 여성 비서 등... 보기 좋은 것들만이 당당하게 팔린다. 가난은 팔고 싶은 자와 팔리고 싶은 자의 컬래버레이션 아래 비로소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찾는다. 그 상품은 감독과 마찬가지로 한평생 몸에 지하철 냄새 밸 일이 없는 묵은 무말랭이 같은 주연 배우들이 생글생글 제가 맡은 인물의 인생이 너무 가엾고 안쓰러웠습니다 할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아크로폴리스따위가 된다. 누군가 시장통에서 팔아치운 가난을 이들이 백화점 디스플레이 앞에 서서 우아하게 골라 쓰는 것이다. 이 배우의 얼굴을 감독은 이 시대 젊은이들을 대표하고 상징할 수 있는 마스크라 말했다. 처연하고 왜소한 외관. 감독에게 가난의 몸집이란 그런 것이다.
이번에도 인물들이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유사 관계를 가지고 소녀가 죽는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소녀들의 죽음. 물론 안다. 박사장 부부가 소파에서 별안간 애무타임을 가진 것은 있어 보이는 상류층 인간들 사이에서도 추잡한 언행이 오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며(그래서 어쩌라고 좋아하라고?) 기정이가 죽은 것은 집안에서 가장 능력 있는 인물이면서 원제인 데칼코마니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집안에서 가장 능력 있는 인물인 박사장의 죽음과 대칭을 이룰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생충 안의 '기득권 부부'와 '빈곤층 기정'으로서 바라봤을 때이고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또다시 관례처럼 두 사람이 쓸데없이 의미부여된 섹스를 하고 소녀가 죽는다.
이러한 현실화된 가난 판타지를 두고 누군가는 'showing'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정말 'showing'이라고 함).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로써 가난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누구인가? 그들에게서는 과연 지하철 냄새가 날까? 지하철 냄새가 나는 이들에게 지하철 냄새를 맡게 해서 뭘 어쩔 셈이었을까? 그게 정말 'showing'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첫째로는 이미 누군가에게는 현실인 것을 화면으로 아름답게 보여봤자 내일 식비에 보탬도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말 보일 뿐이었다면 숙주에게 보였어야지 기생충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기생충>은 숙주들의 박수를 받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작품이다. 칸 영화제에서는 지하철 냄새가 나지 않을 테니까. 숙주들이 기립박수를 깔깔 치고 좋아해줬다는 소식에 생충이들도 아침나절 조조를 예약해놓고 어성초 차 한 병을 왼쪽 팔걸이에 끼운 채 성실히 관람을 했다. 그중 한 생충이는 영화가 어땠느냐는 교수님 물음에 好看 好看 하였다.
요즘은 기만이 판친다. 존재만으로 경멸받는 레즈비언들도 그렇고(난 페미니스트다.) 섹슈얼 코드에 환장한 감독이나 남배우들도. 본 작품이 아마도 명예로운 것 같아 보이는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포인트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영화가 그런 영화제에서 그런 지점 때문에 박수를 받았구나 싶어진다. 정말 간결하게 사실만이 서술되어 있으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문장을 오랜만에 혹은 거의 처음 써본다. 이 영화가 그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난 이 영화를 보고 어쩐지 좆같다.
후기가 더 길어지기 전에 마치려는데 감독에게 두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첫 번째로 관심을 갈구하는 가정 내 주변인 청소년 다혜를 표현하려던 건 알겠는데 이 아이가 왜 기우와 딥키스를 했어야 했나요? 기우는 제정신인가요?
그리고 두 번째로 저택 벙커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은 좁은 길과 닮은 여성의 질을 은유한 것이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침입자들은 남성의 정자를 상징하는 것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