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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May 22. 202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2017. 07. 05.


토끼로 변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가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 두 사람 모두에게 더 이상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황하던 시선을 침범한 작품이다. 아주 오랜만에 운명을 만났다. 대개 작가가 아닌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드문데, 만일 길을 가다가 토마시와 테레자 혹은 사비나와 프란츠를 만난다면 키스하고픈 욕구를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마음껏 만지고 입맞추고 껴안고 그들의 영혼까지 깨물어 삼키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따금 생각나는 구절은 사비나의 중산모자를 두고 반응이 갈리는 토마시와 프란츠. 반응과 동시에 분위기도 갈리고, 프란츠는 어떤 맥락의 실마리도 없었기 때문에 그 순간 사비나와의 섹슈얼리즘을 형성하지 못했다. 맥락 단절사회에서 고통받는 시기라서인지 아니면 원래 과장된 감동을 분비하는 스타일인지 나는 아직까지도 포인트를 잡을 수가 없지만 프란츠가 소실된 맥락에 당황하기 이전, 테레자와 사비나가 서로 옷을 벗고 셔터를 누르던 그 찰나에 둘 사이 강렬한 사랑을 엿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나를 압도한 것이다. 셔터음과 플래시 불빛, 바로 그 순간만큼 테레자와 사비나는 서로를 사랑했다. 이윽고 사비나는 혐오해 마지않는 키치를 떠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무덤을 만났고 테레자는 토마시와 함께 피아노와 바이올린 이중주가 들리는 어느 건물 윗층 전등갓의 커다란 나방을 바라봤다. 누구라도 약해진 채, 그리고 예정된 결말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비참하게 해체해버린 채.

 행복이니 슬픔이니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단어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무거움을 버릴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부분에서 너무나도 오랜 시간 눈길을 옮길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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