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기획자의 딜레마
기획자로서 처음 커리어를 시작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조언은 "사용자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클릭 수를 한 번이라도 줄이고, 화면 전환을 매끄럽게 만들며, 결제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 흔히 말하는 '프릭션리스(Frictionless, 마찰 없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UX의 지상 과제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저 역시 가상자산 거래소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이 명제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루에 수천억, 많게는 수조 원이 오가는 거래소의 PM으로 일하며 저는 그 믿음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돈을 다루는 플랫폼, 특히 한 번 전송하면 되돌릴 수 없는 블록체인 기반의 서비스에서 '무조건적인 빠름'은 때로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커머스 앱에서 옷을 사는데 결제 버튼을 누르기까지 팝업이 세 번이나 뜬다면 사용자는 화를 내며 앱을 꺼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1,000만 원어치의 비트코인을 다른 지갑으로 전송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주소를 잘못 복사해서 엉뚱한 곳으로 돈을 보낸다면 그 돈은 영영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버튼 한 번만 누르면 1초 만에 전송 완료!"라는 UX가 과연 '좋은 경험'일까요?
거래소 기획자로서 제가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바로 여기였습니다. 사용자는 본능적으로 빠르고 편한 것을 원하지만, 역설적으로 금융 앱은 그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송금 버튼을 누를 때 "정말 이 주소가 맞습니까?"라고 한 번 더 묻고, 출금할 때 OTP와 이메일 인증을 요구하며 귀찮게 굴어야 합니다. 기획자 입장에서 이 과정은 일종의 '의도된 불편함(Intentional Friction)'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과정은 순탄치 않습니다. 실제로 보안 절차를 강화하거나 확인 팝업을 추가할 때마다 고객센터(CS)에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냐", "빨리 팔아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는 항의가 접수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기획자는 흔들립니다. 편의성을 위해 이 안전장치를 풀어야 할까? 아니면 욕을 먹더라도 고객의 자산을 지키는 것이 맞을까?
빗썸에서의 경험이 제게 준 답은 명확했습니다. 핀테크에서만큼은 '속도'보다 '신뢰'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느끼는 약간의 귀찮음은, 내 돈이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으로 치환됩니다. 송금 직전, 빨간 글씨로 뜬 '수취인 확인' 경고 문구 덕분에 오입금을 피한 고객은 그 순간의 '불편함'에 감사하게 됩니다. 결국 금융 서비스의 본질은 돈을 불리는 것뿐만 아니라, 내 돈을 잃지 않게 해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용자를 마냥 괴롭히는 것이 정답은 아닙니다. 핀테크 PM의 진짜 실력은 무작정 허들을 높이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한 순간'에만 개입하는 균형 감각에서 나옵니다. 평소 로그인이나 시세 조회 같은 가벼운 행동은 물 흐르듯 빠르게 넘겨주되, 자산이 이동하는 치명적인 순간(Critical Moment)에는 단호하게 "잠깐 멈추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강약 조절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도 '불친절한 기획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불친절함이 사용자의 짜증을 유발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그들의 소중한 자산을 지켜주는 든든한 안전벨트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성과 안전성이라는 양극단의 가치 사이에서, 오늘도 저는 아슬아슬하지만 가치 있는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