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루틴: 법안 PDF 읽기

by Wayne

보통의 PM 또는 기획자들은 출근해서 데이터 대시보드를 확인하거나, 최신 IT 트렌드 아티클을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기획자로 일하던 시절, 저의 아침 루틴은 조금 달랐습니다. 저는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에서 새로 배포한 보도자료 PDF를 열어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획자가 UX 레퍼런스가 아닌 재미없는 법인을 들여다본다니 조금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돈이 오가는 핀테크 생태계에서 ‘법과 규제’는 프로덕트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가장 거대한 인프라 그 자체입니다.



법을 모르는 PM은 기획서를 절대 쓸 수 없다

처음에는 규제들이 너무나 답답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토스처럼 혁신적이고 매끄러운 사용성을 위해 고민하고 새로운 기능을 기획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자금세탁방지(AML)니 고객확인제도(KYC)니 하는 복잡한 법적 요건들을 화면에 욱여넣어야 했으니까요. 법무팀에서 내려온 검토 의견서를 볼 때마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라는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규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짤리거나 맨날 거절만 당하는 아무것도 못하는 기획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기획자의 관점에서 법안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가 컴플라이언스 팀이나 법무팀 처럼 법조문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이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PM의 법안 공부는 ‘입법의 취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유저의 동선’으로 치환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 개정안이 발표되면, 그 법이 유저의 로그인 화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입출금 버튼을 누를 때 어떤 팝업을 띄워야 합법적인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습니다.



컴플라이언스 팀의 “안 됩니다” 방어하기

규제를 공부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사내 컴플라이언스 팀 및 법무팀과의 커뮤니케이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컴플라이언스 팀이 “이 기능은 규정 위반 소지가 있어 안 됩니다”라고 하면 기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법안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 후부터는 대화의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단순히 UX가 나빠진다고 불평하는 대신, “해당 조항의 핵심은 유저의 명시적인 동의를 받는 것인데, 그렇다면 별도의 전체 화면을 띄우는 대신 온보딩 과정에서 툴팁과 체크박스로 갈음하면 법적 요건도 충족하고 이탈률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의 테두리를 정확히 이해하니, 그 안에서 유저를 위해 뛰어놀 수 있는 합법적인 우회로와 최적의 UI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규제를 유저의 언어로 통역하는 사람

결국 핀테크 PM은 일종의 ‘통역사’입니다. 금융 당국의 차갑고 복잡한 규제 언어를 개발자에게는 명확한 ‘시스템 로직’으로 번역해주고, 유저에게는 불안감을 덜어주는 ‘친절한 안내 문구’로 통역해 주어야 합니다. 법안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은 기획자에게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꽉 막힌 제약 속에서도 비즈니스의 목표를 달성하고 유저의 경험을 방어해 내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핀테크 PM은 새로운 트렌드나 법안이 뉴스에 오르내리면, 반사적으로 ‘우리 서비스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규제라는 단어 앞에서 겁먹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이 깐깐한 허들을 어떻게 하면 유저가 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핀테크 업계에서 일하며 배운 기획자의 생존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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