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입사 과정을 통해 디테일 살펴보기
스물여덟의 나이, 딱히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나이에 첫 회사에 입사를 했다.
사실 일반 사기업을 다닌다는 것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신문방송을 전공하면서 실력보다는 꿈을 더 키웠던 탓일까. MBC, KBS, SBS라는 단어에 마음이 설렜을지언정 삼성전자, SK텔레콤, 현대자동차는 그저 몸집이 큰 대기업에서 부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대표적인 삶의 대명사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4학년 1학기를 마친 스물여섯의 나는 영국 어학연수를 떠났다.
한 학기를 쉬는 동안 나에게 조금 더 맞는 삶의 방향을 찾아보자. 그렇게 영국 브리스톨이라는 대도시도 소도시도 아닌 곳에서, 한국인이 많이 없다는 유학원의 말을 믿고 떠났다. 그렇게 떠난 영국 어학원에는 '한국인이 없다'는 말을 믿고 나처럼 온 한국인이 우글대기만 했더랬다.
무튼 영국에서 나는 이상한 자존심 혹은 고집으로 한국인들과는 인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유럽 아이들과 영어만 쓰면서 6개월을 버텼다. 물론 5~6개월 차가 되면서 친해진 한국인 케이(한국인이지만 나는 그놈의 영어를 배운다는 고집 탓에 한국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는 했고, 고맙기도 했다.
영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당시 '로스쿨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철없는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로스쿨이라는 제도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안정적으로 살기에 그런대로 괜찮은 제도 같아 보였다. 아직 머리가 말랑말랑할 때 공부를 잔뜩 해두면 미래가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로스쿨 입학 출제시험을 몇 회 프린트해 차분히 풀었다. 난 여기에 별로 재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한국에 돌아와 스물일곱의 나이로 결국 나는 사기업 홍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왕 사기업에 다닐 거면 최소한의 기준을 정해놓자고 다짐했다. 기업의 규모와 연봉에 대한 기준치를 정해놓았다. 2013년 하반기 30여 개 기업에 원서를 썼고 그중 6곳의 면접을 통해 4곳에 최종 합격을 했다. 학점이 다소 좋지 않았기에 서류 합격률은 주변 동기들보다 낮았던 것 같지만 면접 합격률은 많은 연습으로 높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붙은 기업들이 다들 애매했다.
A기업은 서울 근무에 대한민국 전자업계에서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였지만 연봉이 낮았다. B기업은 자동차 그룹사에 연봉이 매우 높았지만, 핵심 계열사가 아니었고, 경기권에서 막 개발되는 상태라 교통도 그리 좋지 않았다. C기업은 같은 자동차 그룹사에 조금 더 핵심 계열사였지만 지방에서 근무를 해야 했다. D기업은 서울 근무에 연봉도 괜찮았지만, 그룹사와 해당 기업의 규모가 비교적 작아서 미래성장성에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고민에 고민 끝에 가장 리스크가 적은 한 기업을 선택했다.
한 기업의 홍보담당자로서 사진 촬영, 사보 업무, 사내기자단 운영을 시작으로 내 업무를 꾸준히 확장해 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능력이 좋았다기보다는 새로운 걸 시도하기를 좋아하는 내 성향을 잘 이해해주셨던 당시 나의 팀장님이 '그래, 뭐든 해봐.'라는 태도로 너그럽게 대해주셨던 덕분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 팀장님은 이후로 회사에서 승승장구를 하시며 내가 대리를 달기까지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고 시도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주셨다.
그런데 대리 3년 차부터 매너리즘이 강하게 오기 시작했다. 홍보조직은 여전히 커지지 않았고, 기업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여전히 사양산업이었으며, 새로운 팀장님은 '믿는다'라고 하셨지만 '방임'이라는 형태로 나의 업무를 일임하셨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 홀로 일한다는 기분이 들 때가 점점 많았고, 매너리즘의 강도도 그만큼 강해졌다. 같이 일하는 홍보담당자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직장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할 만한 자극을 받지는 못했다. 나는 내 업무들을 점점 자동화시켜놓으며, 남는 시간들을 다른 방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나는 부동산과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팟캐스트와 유튜브도 함께 들으며 내가 처음 사기업을 선택할 때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나 그럴 테지만 나는 더 젊은 나이에 세상을 여행하고, 글을 쓰고, 내 족적을 다른 방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대학생 때의 나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로 인해 시간들은 더욱 많아졌다. 그렇게 8년 차, 첫 직장에서의 퇴사를 구체적으로 마음먹고 그다음은 어떤 계획으로 살아가야 할까를 상상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