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풍경들
오늘은 한국에서 중1 1학기를 마치고 폴란드 국제학교 7학년으로 전학 온 둘째의 생일이다. 미리 자리 잡은 선배 한국 엄마들에게 정보를 수소문해 맛있다는 베이커리의 케이크를 사 왔다. 하나를 고르기가 힘겨웠던 화려한 한국의 생크림 케이크는 언감생심, 수수한 치즈케이크에 계산대 한편에 있는 파티용 초 세트 하나도 같이 집어왔다. 한국에서는 케이크를 포장하면서 으레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질문이 나올 텐데, 여기서는 그런 서비스도 없거니와, 설사 물어온다 하더라도 못 알아듣고 갸우뚱할 것이기에, 유료구매가 섭섭할 새도 없다.
등교 준비를 마친 아이들이 2층에서 내려올 때쯤 케이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소녀들은 아침을 거르는 것이 유행인가, 먹는 것은 마다할 것이므로 촛불이라도 불어 끄고 가야지. 주섬주섬 케이크와 초를 꺼내 초를 꽂으려고 보니, 색다른 디테일이 보인다. 케이크에 꽂을 초치곤 굵다 했더니, 촛농을 받아주려는 목적인지 꽃받침처럼 생긴 양초 받침이 초 색깔과 동일하게 들어있었다. 오호~ 이런 디테일이! 그러나 몇 초 후 경악하게 된 나. 초를 끼워야 하는 홈이 초 굵기보다 작다! 억지로 끼우다 보니 미끌거리는 초가 찌글찌글 깎여 지저분하게 떨어진다. 꽃받침 위에 있는 양초 찌꺼기들이 케이크로 우수수 떨어질까 봐 털어내려니, 간신히 꽂아 넣은 초가 홈에서 다시 빠지고 만다. 아! 케이크에 꽂을 초에서도 느껴지는 감정! 한국이 좋았는데!
어쩌면 유럽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보다 유럽의 음식은 그다지 다채롭지 않다고 느껴지고, 비싼 외식 물가에 집밥만 해 먹게 되며, 한국 식재료는 비싼 현실, 그리고, 아이들의 학용품이나 필기구, 생활용품의 품질이 확연히 떨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폴란드 입국 후 두 달을 꽉 채운 시점에 '생일'을 맞이하고 보니, 2025년 한 해 우리 가족의 생일을 뒤돌아보게 된다. 1년 중 가장 빠른 생일인 큰 딸의 생일은 5월 초, 당시에 우리 가족은 폴란드 이주를 앞두고 1주일간 바르샤바를 사전 방문했던 때였다. 엄마와 함께 14시간 비행 후 먼저 폴란드에 있던 아빠와 상봉한 다음날이 큰 아이의 생일이었다. 호텔에서 미역국은 기대할 수도 없었으니, 남편은 마트에서 작은 조각 케이크를 사서 생일 축하를 준비해 놓았다. 낯선 바르샤바 호텔방에서의 첫날, 단촐한 조각 케이크 옆에는 컵 미역국이 4잔 놓였다. 폴란드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며 지내기 위해 남편이 바리바리 준비해 간 건조블럭에 뜨거운 물을 부어 조리한 즉석 미역국이었다. 조촐했지만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하는 생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모두 즐겁게 웃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주 준비로 바쁘게 지내던 중 나의 생일이 되었다. 내 생일에도 내가 끓인 미역국과 케이크로 생일을 축하하곤 했는데, 이번 생일은 내 생애 최초로 생일날 아침에서야 내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
"오늘 내 생일이잖아?"
생일 아침에 온 가족이 미역국에 케이크를 불던 행사(?) 없이, 마찬가지로 당일 아침에서야 아내의 생일을 깨달은 남편은 퇴근 후 아이와 함께 꽃다발을 사 왔다.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 급하게 준비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축하 선물, 꽃다발은 결혼 15년에 그렇게 처음 받아보았다.
한국 생활의 정리, 비자와 입국 날짜 딜레이, 짐을 싸고 이동하는 그 모든 혼란을 뒤로하고 바르샤바의 한 아파트에 임시로 짐을 풀었을 때였다. 입국한 지 1주일 만에 아이들이 국제학교 등교를 시작하고 또 1주쯤 지났을 8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하느라 전화도 한번 없는 남편이 웬일로 전화를 해왔다.
"오늘은 일찍 와? 마트에서 배추를 사다가 겉절이 김치를 담아봤는데, 꽤 그럴 듯 해! 이따 맛봐."
"글쎄, 오늘은 나가서 먹고 싶은데..."
"왜!?"
"오늘이 내 생일이더라고."
맛있게 만들어진 겉절이를 거부당한 황당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미안함이 몰려왔다. 가장 연장자인 남편은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음력 생일을 쓰고 있어서 아이들은 매번 기억하지 못했고, 나도 달력에 표시해 두고 챙기던 날이었다. 원래의 습관대로 쓰던 달력도 이젠 없는 데다 한국 달력이 필요하지도 않은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남편의 생일을 나도, 아이들도, 그리고 정작 본인도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그만큼 각자의 매일매일이 혼란과 방황과 도전하는 날들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부모님들의 생일 축하 연락을 받고서야 본인 생일을 알게 된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기꺼이 즐거운 외식을 했다.
그렇게 지난 한 해의 생일들은 마치 다 같이 그렇게 되기로 작정한 듯이 기존의 틀을 깨는 풍경이었다. 이전까지 생일이란, 평온한 일상 속에서 생일날 아침을 맞이하여 다 같이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우리의 생일들은 마치 그다음의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고 예고하는 것처럼 하나같이 꿈틀댔던 것이다. 혼란의 시기를 뚫고 난 지금, 우리 가족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알을 깨고 나왔다. 내가 살아갈 공간의 범위가 '이것'까지라고 믿었던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이 '여기'까지라고 여겼던 것, 예측할 수 있는 나의 미래는 '거기'까지라고 한정지었던 것이 바로 그전까지 살아왔던 알의 껍데기 속이었다.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안타까웠던 생일의 풍경들도 알 껍데기에 균열이 생기는 과정 중 하나였을 것이다. 드디어 알은 완전히 깨어져 열렸고, 우리는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광활한 미지의 세상에 놓였다. 아직도 일상의 하나하나가 도전이고, 어쩔 수 없이 움츠러드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가끔은 알 속에서의 평온했던 일상이 그립기도 하다.
폴란드 입국 두 달을 꽉 채운 시점에 맞이하는 우리 집 막둥이의 생일을 의미 있는 케이크로 축하하고 싶었던 데에는 지난 한 해 우리의 생일들이 매번 너무나 허무하게 지나갔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는 감회를 글로 쓰고 싶었던 것 역시 우리 가족에게 아주 큰 변화가 있었던 한 해 동안의 생일날 풍경이 예년과 다른 모습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시공간이 어디까지일지 가늠할 수 조차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미 넘어섰으며, 우리 가족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 이렇게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 불안으로 다가오던 것이 과거의 나였는데, 그랬던 나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이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오히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 경험은 나와 내 가족을 어디로 이끌어가게 될까. 나 조차도 낯선 현재의 나는 이제 그 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