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한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회식에 야근에 늦게 들어오던 남편이 바르샤바에서는 달라졌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람이 바뀐 게 아니라 다른 문화에 따라갈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는 야근하는 사람도 당연히 없거니와 회식 문화도 없어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저녁 먹으러 가는지는 몰라도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직장에서의 잦은 회식은 스트레스인 게 맞지만, 아예 없는 것도 뭔가 메마른 느낌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은 아예 없는 곳에서 남편은 고독하게 일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남편과 나는 집에서 종종 맥주나 와인을 마시게 되었는데, 와인이 싸기도 하거니와 밖에서 술을 마시면 한국과는 달리, 대리운전이나 택시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일인데, 하루는 몇몇 직원들과 저녁 먹으며 한잔하고 온다며 남편이 집에 차를 두고 다시 나간 날이었다. 아이들과 언뜻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깨어났는데, 남편이 궁시렁거리며 이메일을 열어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왜? 무슨 일 있어?
"큰일 났어. 우버 타고 오다가 잠깐 졸은 거 같은데, 핸드폰을 놓고 내린 거 같아. 택시 기사 연락처가 있을 텐데 노트북에서는 왜 링크가 안 열리지?"
보통 큰일이 아닌 상황! 지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남편이 한국과 폴란드 유심 칩을 갈아 끼워가며 사용하다가 한국 유심칩을 잃어버렸단다. 은행이나 관공서뿐 아니라 모든 개인 인증이 올스탑되어서 대사관을 통해 인감증명서를 동원하는 등 후속 조치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인은 아직도 몇 개월째 카드 대신 현금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휴대폰을 분실하면 머리가 아파오는데, 하물며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며칠 전, 세탁기 설치 문제를 집주인과 의논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남편과 언성을 높였더랬다. 집주인에게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의 말투에 짜증이 묻어있었는지도 몰랐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시달리고 왔을 남편은 또 그 얘기냐며 짜증으로 응수했는데, 결국 감정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다툼으로 번졌다. 타국에서 매일매일이 챌린지인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은 남편이나 아이들 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매일이 힘든 하루하루지만, 나의 힘듦이 남편의 힘듬보다 무시당해도 될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남편의 화난 눈빛과 표정은, 내 힘듦을 이해받지 못한 섭섭함을 남겼다. 마음속 깊이 먹칠을 했다. 그러나 먹고사는 일은 날카로운 감정을 부득이하게 잊게 만드는 법. 화해가 아닌 망각으로 일상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그때 긁힌 감정은 아직도 내 안에서 분노를 사그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보듬고 다독여가며 헤쳐나가야 할 해외살이이건만, 나의 어려움이나 노고는 전혀 배려받지 못하는 듯한 섭섭함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 어릴 때 세팅해 둔 휴대폰 위치 추적 기능에 가족 중 남편만 없는 것이 내심 아쉬워 위치추적 활성화를 제안했을 때에도 거부했던 남편이었다.
"그건 내 프라이버시야."
퇴근해서 어디쯤 오고 있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었다. 뭐 얼마나 숨기고 싶은 게 있길래 저러나 싶었지만, 나도 남편에게 위치 추적 당한다면 달갑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해외에 나오고 보니, 우리 가족 외에는 의지할 데도 없고 비상 상황에 대비해서 위치추적 켜놓는 게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에 이번에는 의외로 순순히 응해왔다. 그 후로 퇴근을 알려오는 남편의 도착 시간을 가늠하는 목적으로 가끔 활용하면서도 남편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았었다. 우버 택시 기사의 연락처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답답한 이 상황에서, 정작 더 화가 나는 사람은 본인이겠지 싶어 내 화는 애써 누르며 위치추적을 열었다. 택시 뒷자리에서 계속 울려대고 있을 휴대폰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위치에 멈춰서 있었는데, 전전긍긍 Uber 홈페이지를 훑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거 봐. 택시가 영업 끝나고 집에 갔나, 멈춰 있네."
별안간 귀가 번쩍 뜨인 남편은 얼른 가보자며 벌떡 일어선다. 허! 이 사람아! 위치 추적도 오차가 있고, 그 위치에 간다고 해도 이건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미 시간은 새벽 3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이대로 잃어버린 후에 찾아올 혼란은 더 까마득했으므로 남편과 집을 나섰다. 바쁘다며 미루고 미루던 내 차를 사 온 게 며칠 전이었는데, 그마저도 차 없이 뚜벅이로 다니느라 지친 내가 남편을 닦달한 결과였다. 가로등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술 마신 남편 대신 운전해 달리며 나는 윽박질렀다.
"이제 술 마시지 마. 어쩌다 한번? 여기가 한국인 줄 알아? 휴대폰 잃어버리면 은행이고 생활비고 뭐고 다 끝장이야. 사고 치지 말고 우리 무사히 잘 살다가 한국 돌아가자. 어?!!"
평소 본인 말이 다 맞는 남편은, 지은 죄가 있으니 입이 있으나 말이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주소지. 컴컴한 철창 울타리가 쳐진 넓은 주차장 안에 택시들이 꽤 많이 주차되어 있는 차고지 같은 곳이었다. 생각보다 희망적이었던 점은, 한국과는 달리 여기는 밀집되어 사는 형태가 아니라 집도, 차도, 사람도, 휴대폰도 밀도가 낮다는 것을 도착 후 깨달은 것이었다. 안 쪽의 건물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이 움직여 다니고 있는 것도 그 새벽 시간을 감안했을 때 놀라운 일이었다. 문 앞 간판에 쓰여있는 번호로 전화를 해대고, 철창을 흔들며 소리치고, 휴대폰 조명을 켜서 흔들기도 하고, 남편과 나는 절박함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철창을 흔들며 소리치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이 황당한 상황에 다시 치밀어 오르는 화를 나는 온 힘을 다해 눌러야 했다.
신이 도왔을까, 건물에서 사람이 나왔다. 남편은 영어로 please를 외쳤지만, 폴란드 현지인 중에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도 많았기에 한참만에 'phone'이라는 말을 알아듣고 문을 열어준다. 따라 들어가면서 택시들을 둘러보는데, 불 꺼진 택시들 중 한 대에 불이 켜지면서 기사가 나와 폴란드어로 몇 마디 나눈다. 남편은 아까 탄 택시 기사가 맞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택시 뒷자리에서 가지고 나온 휴대폰을 건네받을 때의 안도감이란! 상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땡큐! 땡큐!'를 외치고 되돌아 나왔다. 남편은 찾았다는 감격에 흥분해 있었다.
"와! 이걸 찾다니! 위치 추적 안 해놨으면.... 으아...."
그러나 나는 안도감이 찾아오자 그제야 이 남자의 부주의, 돈벌이 외에 나의 살뜰함이 챙기고 있던 우리 가족의 제반 사항들, 그러나 그 노고는 인지하지도 못하고 나에게 화내던 이 남자의 눈빛, 위치추적도 거부했던 남편의 지난 행태에 오히려 더 화가 났다. 휴대폰을 되찾은 이 상황이 아내의 사전 대비 덕분이라는 것을 주지 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그렇게 말해도 매번 콧방귀만 뀌지? 그렇게 세상 당신이 다 맞다고 생각하면서 살지 마. 마누라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야."
역시 남편은 6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쉽게 고개 숙이지 않는다. 인정은 하면서도 자존심은 꼿꼿이 세우고 있는 듯하다. 그 후로 나는 남편에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조금은 차가운 선을 하나 그어두는 것으로 내 자존심을 세웠다. 해외살이는 가족을 똘똘 뭉치게 한다던데, 그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었구나.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런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그렇게 돼 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