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가 좌절하는 건 못 참아!
입학 후 2달여, 국제학교에 가면 파란 눈의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졌던 큰 딸의 의기소침이 우울함으로 바뀌는 듯한 어느 날이었다. 한국에서 수학 선행은 하지 않았는데도 욕심껏 공부해 왔던 가닥이 있어서인지, math에서 자신감 있게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방과 후 math club에도 들어가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다는 Math Competition Trip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본인이 Standard Math를 수강하고 있고, 심화과정인 Extended Math 과목이 따로 있으며, 선생님과 상의해서 심화반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High School의 시작인 9학년으로 입학했으나 국제학교는 처음이었으니, 엄마도 아이도 한국에서의 학교 생활과는 다른 시스템에서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수학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내 상담 약속을 잡고, Extended 반으로 옮겨가고 싶다는 소신을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수학 퀴즈와 카운슬러 선생님과의 테스트 후 원하는 반으로 옮겨주겠다는 상담을 마치고 온 이야기를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한국의 시스템과 달리 아이마다 시간표가 제각각 다르고, 자신이 수강신청한 과목에 따라 교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하는 방식에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의 Standard 반에 있는 미국 친구들은 친해지기도 어렵고, 대화를 시도해도 무시당하기 일쑤라 친구 사귐에 어려움을 토로하던 차였다. 옮겨가고자 하는 Extended 수학 반에는 체육시간에 친해진 우크라이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도 수업 시간에 짝꿍이 없다며 와서 같이 공부하자고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워낙에 친구관계가 중요한 사춘기 아이들이기도 했거니와, 다수를 차지하는 기존의 미국인 여자아이들이 그들의 공고한 커뮤니티 안에 동양인 친구를 끼워주지 않는 듯했다.
하루에 2번의 테스트를 치러야 한다며, 한국 친구들과 노는 것도 포기하고 나름의 공부를 하는 아이는 의기소침한 학교 생활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듯했다. 새로운 반으로 옮겨가서 마음 맞는 친구와 즐겁게 지낼 생각에 의욕적으로 방법을 찾은 아이가 내심 기특했다. 점심시간에 카운슬러 선생님에게 가서 시험을 보느라 빵 하나로 점심을 해결했다는 아이는 다음 날, 시험에 통과했으며, 기존 반과, 옮겨갈 반의 선생님, 부모의 서명을 받아오라는 Schedule Change Form을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부터 새로운 반으로 갈 예정이라며 엄마의 서명을 가지고 신나게 등교한 월요일. 하교한 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그 반으로 못 간대. 그 반에 이미 인원이 다 차서 못 간다고, 카운슬러가 인원 확인을 잘못한 거 같다고 미안해하긴 했어."
처음엔 울컥했으나 학교에서 마음 정리 다 됐다며 단념하는 아이를 보는 내 심정이 타들어갔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서 그 모든 과정을 절제해 가며 진행해 온 아이의 노력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 아닌가. 선생님의 실수라고는 하지만, 스스로와의 약속과 인내와 노력을 해온 아이가 어른의 실수를 감당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이는 이번 기회 삼아 의기소침을 끝내고 가뿐하게 날아갈 준비로 날개를 파닥이고 있는 듯 보였는데, 이건 아이의 의욕을 꺾어버리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행태가 아닌가 말이다.
한국에서도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편인 데다, (교양 있고 점잖은 학부모로서?) 웬만한 것에는 문제제기 할 일이 없었더랬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 자기 길을 잘 찾아가는 아이 옆에 서 있는 부모로서, 부당함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정당해 보였다. 짧은 영어로 어떻게 메일을 쓸지 고민하는 나에게 지인이 귀띔해 주었다. 챗 GPT 써봐. 아주 잘 써줄 거야.
[폴란드에 이주해 온 한국인이야. 국제학교 9학년으로 입학한 아이가 Standard에서 Extended math로 옮겨가려고 테스트를 봤는데, 승인이 다 떨어지고 서명을 받아간 이후에 빈자리가 없다고 불가능하다는 선생님한테 항의 메일을 쓰려고 해. 이 글을 강한 어조의 영어로 바꿔줄래?]
[네. 강하고 단호한 어조로 써드렸습니다. 혹시 필요하다면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바꿔드릴까요?]
[좋아. 부드러운 어조로 써줘]
[네. 부드러운 어조로 바꿔드렸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부드러운 어조와 단호한 어조의 중간쯤으로 바꿔줄 수 있을까?]
[네. 부드럽지만 물러설 수 없는 단호한 어조로 바꿔드렸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해외 생활에서 챗 GPT의 강력함을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AI 세상에서 유영하고 있는 딸아이가 알려준 덕에 낯선 언어, 낯선 브랜드의 세탁기 사용법, 처음 보는 보일러의 난방 세팅 등 실제 생활에서 막막할 때마다 아주 똑똑하게 해결해 주는 든든한 AI였다. 한글로는 당연히 '정중하되 단호한 어조'를 써낼 자신이 넘치는 나였다. 한글의 그 어조를 똑똑하게 잘 잡아낸 AI는 내 맘에 꼭 드는 영어 편지글을 써주었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항의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회신은 실망스러웠다. 다른 과목도 바꾸면 다른 Extended 반으로 갈 수 있다는 차선책을 알려주면서, 자신이 실수한 점은 언급 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는 더 강하게 메일을 썼다.
'당신의 실수를 아이가 감수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정원 외 인원으로라도 반에 넣어주십시오. 교장선생님께 이야기해서 의논해도 되겠습니까?'
그만큼 나의 분노는 컸다. 내 아이의 노력이 기특했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카운슬러의 태도가 명백하게 보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돌아온 회신은, 더 얘기하고 싶으면 카운슬러나 교장에게 화상으로 상담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영어 글쓰기보다 더 어려운 스피킹으로 상담을? 게다가 항의하는 상담을? 영어가 안 되는 나 자신이 이렇게나 억울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였다면 선생님이 저렇게 뻔뻔하게 대응하지도 않겠거니와, 부드러운 어조이든, 강경한 어조이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영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이 너무 속상했다. 아울러 다들 선망하는 국제학교이건만,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학교 측이 괘씸했다.
그나마 영어가 되는 남편에게 얘기했지만, 선천적으로 싸우는 걸 싫어하는 남자는 그냥 그쯤 하란다. 이걸 해결해주지 못하는 엄마인 것이 딸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는데, 그것을 보는 딸아이는 오히려 덤덤했다.
"엄마, 됐어. 그만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심정은 오죽할까마는, 한참을 고민한 후 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한 메일을 읽씹 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고, 마음을 비워버렸다. 처음 항의 메일을 보내겠다고 했을 때부터 아이는 엄마를 말렸었다. 이제는 부모의 개입을 꺼려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내가 더 상처받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더 강하게 항의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이 아이에게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 억울함과 괘씸함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결국 나는 현실 타협을 했다. 나의 정의가 세상의 부조리에 고개를 숙인 느낌이랄까.
며칠 후, 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카운슬러가 아이의 뒤쪽에서 지나가다가 일부러 친근한 척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는 게, 엄마, 자기도 미안하긴 한가 봐."
이제는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묘한 상황과 감정도 스스로 갈무리할 줄 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덤덤해진 아이를 보며, 실패했을지언정 내가 적극적으로 목소리 낸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엄마가 자신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 준 것만으로도 조금은 당당한 힘을 얻었을 거라 믿으며, 현실 사회의 부당함을 맛보는 것과 동시에, 사람 간의 이런 충돌 과정 안에서 손 놓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이라고 나 스스로 재해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나는 속으로 이불킥을 해야 했다. 이런 문제도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한국에서 잘 생활하던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이 과연 잘 한 결정일까. 해결해주지 못해 속상했던 내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 나는 그냥 자기 합리화를 해버린 것은 아닌가. 과연 이방인으로서의 우리 가족이 겪는 이러한 경험들은 정말로 해가 아니라 득이 되는 것이 맞을까… 그러지 않길 바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를, 믿고 싶지 않은 그 의심이 자꾸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몇 주가 지난 후, 여전히 기존의 반에 남게 된 아이는 재미없게 수학을 공부해야 했지만, 얻은 것이 없진 않았다. 아이의 수학 실력이 훌륭하다는 걸 알고 이 모든 해프닝을 지켜본 기존 수학 선생님이, 아이를 위해 별도의 심화 수학 자료를 매 시간마다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취합하여 다음 학기에 심화수학 반으로 테스트 없이 옮겨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차선책이었으나, 아이는 선생님한테 인정받고 특별히 조치받은 것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나도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절박함! 안주하고 머물러있지 않도록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그것이다. 영어를 해야겠다! 괘씸했던 그 카운슬러에게 어떤 측면에선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