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타임 해제되던 날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영국에서 출발해서 지구를 동쪽으로 한 바퀴 돌아 80일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오는 내기를 한 사나이의 이야기. 지중해와 홍해를 지나 중국해와 태평양을 거쳐 갖가지 사건사고를 넘고 넘어 결국 런던으로 돌아오기로 한 80일 시한을 놓쳐버리고 만 후에, 주인공은 알게 된다. 지구를 동쪽으로 돌아온 덕에 하루를 벌게 되어 내기 시한인 80일이 어제가 아닌 오늘이라는 사실을. 이야기는 결국 80일 안에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는 데 성공하여, 돈도 얻고 사랑도 얻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다르게 움직여 시간을 벌게 되는 쥘 베른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일어났다.
폴란드의 영어 생활에 대비하여 한국에서 이어오던 화상 영어 수업을 중단하고 비행기를 탄 것이 7월. 그 후로 3개월여 흘러 10월 말이 되었지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오느라 이미 지불한 비용의 수업이 남아있는 것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하루 종일 영어로 씨름하고 올 아이들의 영어가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 영어 수업을 더 얹는 것은 불필요해 보였기에 굳이 수업을 이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두 아이와 주 2회씩 만나던 필리핀 원어민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지만, 한국과 폴란드의 시차가 7시간, 거기다 한국-필리핀 간 시차 1시간까지 고려해도 선생님의 스케줄표에서 마지막 시간인 밤 9시가 폴란드 시간으론 오후 3시,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이미 지불한 비용이 아깝다고 느껴지던 찰나, 내 영어공부로 대신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래서 폴란드 시간으로 오후 2시, 필리핀 시간으로 오후 8시로 시간을 세팅하고 첫 수업을 기다리던 주말 일요일 아침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거실의 벽시계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늘어지게 잤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안 잤네?'
그러나 잠시 후 휴대폰으로 뉴스를 훑던 나는 뭔가 퍼즐 한 조각이 들어맞지 않는 듯한 느낌에 일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휴대폰 화면 꼭대기, 항상 있는 그 자리에 있는 시간의 이질감이 내 눈에 콕 박힌 것이다. 시간이...? 벽시계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꼭 한 시간 차이가 난다.
그제야 며칠 전부터 '서머타임이 어쩌고 어쩌고...' 하는 얘기들이 떠올랐다. 서머타임이란 단어가 처음 듣는 개념은 아니었다. 한국의 반대편 나라에서는 서머 타임제가 있다는 말을 글자로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런 이질적인 느낌으로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생경했다. 디지털 세계로 많은 것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은 내가 잠들어있던 사이 서머타임이 자동으로 적용되어 9시 50분을 8시 50분으로 자동 변환해 놓았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내 몸뚱이와 벽시계만 어제와 그대로의 관성으로 오늘도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한 시간이라는 간극은 너무나 마법 같아서, 마치 내가 잠든 사이에 시간이 느리게 흐른 것 같기도 하고, 나만 빼고 세상이 통째로 시간 이동하여 타임머신으로 한 시간 뒤로 이동해 온 기분이기도 했다.
'필리핀 선생님과 화상영어 시간을 다시 생각해야겠구나. 필리핀 시간은 그대로인데, 여기 시간은 한 시간 늦어진 거니까... 그럼 2시가 아니라 3시겠군.'
1시간이 늦어졌으니 2시는 이제부터 3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2시보다 느린 건 3시니까. 그러나 이런 초보 시간여행자를 봤나! 필리핀과의 첫 수업날 1시가 되자 화상전화가 걸려왔다. 당황은 물론이고,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2시간이나 차이나는, 시간 개념 체계 자체가 흔들리는 이 상황은 나를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자, 진정하고 서머타임 개념을 다시 확인!
서머타임, 일광 절약 시간제(Daylight Saving Time, DST)
- 하절기에 표준시를 한 시간 앞당겨 사용하는 제도.
- 여름에 일조 시간이 길어 활동을 일찍 시작해 저녁때 밝은 상태에서 활동하고, 조명과 연료 절감을 기대.
- 영국식 영어는 Summer time, 미국/캐나다 영어는 Daylight saving time으로 표기.
- 영국 기준, 시작일에는 01:59:59에서 03:00:00으로, 종료일에는 01:59:59에서 01:00:00으로 조정됨.
이것이야말로 타임머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잠든 사이, 시계는 01:59:59에서 02:00:00가 아니라 한 시간을 되돌아가 01:00:00가 된 것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관통하며 살아오던 나의 시공간 개념을 머리로 인지하는 시간 개념으로 쪼개서 조작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한참만에 서머타임 개념을 이해한 나. '2시보다 느린 건 3시'가 아니라, 2시를 한 시간 되돌려 이제부터 1시로 표기하기로 사회적 합의를 본 것이었다. 지구의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는 중이고, 인간의 편의에 따라 물리적 시간 표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날 이후, 아이들의 하교 시간인 4시는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으로 점차 변해갔다. 깜깜할 때 하교한다던 말은 전해 들었었는데, 한국에서의 겨울철에 5시경이면 해가 지던 것처럼 여기도 4시 반이면 해가 지는 것이었고, 서머타임이 종료되면서 4시 반이라는 시간을 3시 반으로 세팅을 바꾼 것이었다. 여름철과 겨울철의 일조 시간 차이가 크다는 것은 생활환경에 이렇게 큰 차이를 가져오는 거였구나.
서머 타임제를 운영하는 취지는 알겠으나, 이젠 밤에도 불야성 같은 전기 조명으로 밝히고 지구 반대편의 친구와 전화를 하고 드라마를 보는 세상이니, 서머타임의 취지가 무색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3월 둘째 주에는 다시 서머타임을 시작한다고 하니, 다시 한번 롤러코스터 같은 타임머신의 어지러움을 느끼게 되겠지. 그땐 나의 1시간이 어딘가로 증발해 버린 기분일지도 모른다. 현대의 디지털 시대의 1시간도 이렇게 어지러운데, 쥘 베른은 지구 한 바퀴를 반대로 돌고 난 24시간의 차이를 80일에서 81의 세계 일주로 어떻게 창조해 냈을까. 그 창의력에 존경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