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그 나라를 이해한다는 것
폴란드로 오면서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이번 기회에 유럽을 두루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폴란드는 유럽의 끄트머리, 동유럽에 속했지만, 유럽은 유럽이니까. 국제학교 입학 두어 달이 지나고, 일주일간 Autumn Break 기간이 있어 처음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폴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 체코로 국경을 넘어보기로 하고, 자동차를 운전해 출발했다. 바르샤바 도시에서만 생활하다가 시외로 처음 달려보는 도전.
남편이나 나나 해외살이는 처음인 사람들이었으니, 불과 얼마 전 폴란드에서 처음 차를 운전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기억한다. 폴란드는 우회전에도 별도의 신호등이 있고, 교차로의 크기와 관계없이 신호등보단 회전교차로의 비율이 월등히 높으며, 왕복 8차선의 도로에서도 비보호 좌회전을 해야 하는 곳도 있어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한국에서 운전경력이 20년이 넘은 나도 바짝 긴장하여 쫄보가 되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고속도로를 달린다니, 남편도 나도 지난 몇 달간의 적응력에 놀라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체코 프라하 까지는 6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중간중간 쉬어가려면 더 걸릴 테지. 크루즈 기능을 이용한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로 경험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 세상은 너무나 넓고 지식 또한 너무나 많아서 내가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없고 책으로 접하거나 요즘은 인터넷으로 그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지만, 직접 경험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다른 어떤 도구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프라하에 도착해서 느낀 감흥보다도 나에게 더 크게 다가온 것은 폴란드의 광활함이었다. 폴란드-체코 국경에 닿을 때까지 장장 5시간을 달리는 동안 단 하나의 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야겠다.(폴란드 남부에 걸쳐 산악 지형이 있긴 하다.) 고속도로는 약간의 굴곡을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시야를 가리는 야트막한 산 하나조차도 없었다. 길 양옆으로는 하늘과 들이 맞닿아 있는 지평선과 제주도에서나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키다리 나무의 빽빽한 숲이 번갈아 나타났다.
평생을 한국의 자연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의 탁 트인 시야에 환호했다. 그러나 그 광활함이 몇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는 거대함을 알아차리게 되자, 이렇게나 무자비하게 넓은 땅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한편으로 허탈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땅이 얼마나 척박한 것인지가 극명하게 비교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다는 것을 배워왔고 보아왔으나 별 감흥 없이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평지에는 어김없이 집이 들어서고 논과 밭을 일구어내며, 첩첩산중 골짜기에도 사람이 산다. 강원도 고산지역에서는 비탈지형에도 밭이 있고, 일부 남부지역에서는 계단식 논이 있지 않은가.
"와, 이렇게 넓은 땅을 그냥 놀리네? 저거 밭 아니지? 그냥 빈 땅인 거 같은데?
폴란드는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평원의 나라인 것이다. 저 넓은 땅을 왜 그냥 두지? 농사를 짓지 않고? 땅을 일구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이런 생각도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편견인 걸까? 얼마나 활용할 땅이 많으면 그냥 저렇게 비워두는 걸까? 저 빽빽한 숲은 나무를 베어내고 베어내도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축복받은 땅이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여유로운가 보다."
남편은 회사의 폴란드 동료들의 이야기를 종종 이야기했는데, 일의 시한이 다가와도 빨리빨리 처리하기보단 그저 여유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기한을 넘기고도 오히려 '여유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피력하고,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마음이 다급한 건 남편 혼자 뿐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와 달리, 이 나라 사람들의 여유로움은 광활하게 이어지는 땅처럼 평온함이 이어지기 때문인 것일까. 한반도가 배고프고 생계에 시달리던 시절, 해가 지기 전에 고개 넘어 읍내에 다녀오려면 발을 재게 놀려야 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산비탈에 돌을 골라 간신히 개간해 놓은 땅은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다시 척박한 땅으로 되돌아가니 매일매일 일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부지런함과 책임감은 그런 환경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남편과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폴란드의 광활함은 세계 2차 대전 때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니 군대가 쳐들어와도 탱크로 움직이기도 어려웠을 테고, 애를 먹었겠지. 방어하기에도 산악 지형은 숨거나 공격에 이용하기 좋으니까. 그런데 폴란드는 장애물 하나도 없이 탱크가 단숨에 밀고 들어왔겠구먼."
광활한 평원이 축복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군대를 경험해 본 남자가 하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폴란드 땅을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독일 군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폴란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땅이란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단순히 자연만은 아니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 습관뿐 아니라 사고와 문화, 기질까지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것임은 분명하다.
"예전에 외국인 동료가 한국에 다녀갔는데, 그 사람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너무 놀랐던 것이 다리가 왜 이렇게 많으냐는 거였어.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산이 많으니까 큰 강도 많고, 긴 다리도 많잖아. 게다가 요즘은 산이 이어지는 곳에는 터널도 많지만, 높은 다리로 연결해 버리는 곳도 많으니까. 그 사람 눈엔 그 많은 산 봉우리뿐만 아니라 다리가 계속 나오는 게 신기했나 봐."
그러고 보니 체코 국경에 닿을 때까지 강 다운 강을 건넌 기억이 없었다. 터널도 없었다. 아하, 우리나라의 터널 뚫는 기술, 다리 건설 기술은 아주 높은 수준일 수밖에 없겠구나. 우리나라는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고, 기술을 더 발전시켜야 했을 것이다. 폴란드에 과연 터널이 몇 개나 있을까? 손에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그 나라의 지형은 그 나라의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
폴란드의 영토를 달리면서 나는 폴란드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덩달아 내 나라에 대한 이해도 따라왔다. 직접 경험하는 것, 내 눈으로 보고 느껴보는 것,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고 덩달아 나 역시 돌아보는 것, 이런 과정이 성장이고 발전이다. 관광만이 여행이 아니라, 그 나라의 특성들을 조합해 이해하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 어쩌면 요즘의 여행은 너무 관광에 치우쳐있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 해외 살이가 준 기회를 십분 활용하면 나와 우리나라에 대해 이해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통찰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도 배움이 될 것이기에,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은 사춘기 두 딸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너희들도 들었니? 들었지? 안 들었니? 귀에서 콩나물 좀 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