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잃은 나라 옆의 욕망에 갇힌 나라
욕망을 잃은 나라 옆의 욕망에 갇힌 나라
지금이야 이렇게 ‘돈이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이다’라고 생각하는 나지만, 나도 대학생 시절과 사회 초년기 때는 이렇게 돈, 돈, 돈 하는 대한민국 사회가 싫다고 생각했다.
일본어 교육과를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 드라마나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당시만 해도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꽤 있었고, 일본 아이돌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지금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유명하다. 그러나 드라마나 음악은 이제 일본보다 한국이 더 국제적인 위상도 높고 질도 좋아졌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다양하고 참신한 소재로 일본 드라마의 평가가 높았고, 많은 사람이 어둠의 경로로 알음알음 보곤 했다.
의사도 연애하고, 검사도 연애하고, 재벌도 연애하는, 사랑지상주의의 한국드라마에 비해 일본드라마는 소소한 일상이나 추리, 공포, 직업에 대한 고찰 등 다양한 소재가 있었고 따뜻함과 평온함 같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주로 일본 음악과 드라마를 좋아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의 차이를 체감하게 되었다.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도통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의사도, 검사도, 재벌도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연애만 하는 우리나라 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요소가 더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출생의 비밀과 신분 상승이다. 우리나라에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연애 드라마는 거의 없고, 실장님인 줄만 알았던 재벌2세 정도는 나와줘야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실장님의 어머니, 즉, 재벌 사모님인 평창동에 사는 예비 시어머니는 싸가지가 없었고, 착하고 성실한 캔디형 여주인공의 라이벌로는 부잣집 자녀인 성격이 고약한 공주님이 나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캔디형 여주인공의 돌아가신 부모님은 남겨놓은 유산, 그게 꼭 돈이 아니라도 지위(자격)이나 기술 등이 있었고 그걸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여주인공은 연애도 해가면서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지위(자격)나 기술을 되찾는 드라마들이 항상 인기를 얻었다.
그에 반해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소박했다. 신박한 천재형 같은, 현실에 없는 캐릭터가 나오긴 했지만, 그것이 꼭 부(富)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주인공은 성공이나 지위의 획득에 열정을 가지기보다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이치닌마에(一人前)’가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치닌마에(一人前)’라고 하는 말의 뜻은 식당에서는 1인분을 뜻하지만, 그 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홀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자립한 성인, 즉 제대로 된 성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어떻게 하면 내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당시 대학생이던 나의 마음과도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각자 맡은 소임을 다하고, 그 속에서 주인공이 성장해 가는 일본 드라마를 보며, 한국 드라마는 허무맹랑하고 자극적이며, 날 것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조금은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꼭 돈이 아니라도 인생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 많은데 왜 한국은 성공과 부의 축척에 목메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마에 켄이치의 『지식의 쇠퇴(2009)』는 그런 내 생각을 바꾼 책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오마에 켄이치는 이 책에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경제불황의 원인에 대해 말한다. 그것의 원인이 일본의 집단IQ가 낮아진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일본인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로금리인 지금 수수료를 물어가면서 일본의 은행에 저축하는 일본인들을 ‘경제 음치’라고 혹평했다. 막연하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천은 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는 일본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요즘의 젊은이(아, 그때의 젊은이는 이제 중년이...)들은 학력이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욕망도 없다면서 질책했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 젊은이들은 취업하면 차를 샀고,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제는 차를 가지고 싶어 하지도, 여행을 가지도 않는다면서 희망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일본에도 한때는 경제와 정치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시기가 있었고,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고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내용을 읽으며, 한 방 띵-하고 맞은 것이다.
현실적이고 담백한 캐릭터, 과장된 설정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성장을 그리는 스토리, 그 속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일본 드라마를 우아하며 고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들의 생각의 부재와 절망의 결과였단 말인가!
현실과 투쟁하고, 안되는 것을 되게 하며, 불의와 싸워 하나하나 쟁취한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였다. 그에 비해 일본은 국숫집부터 국회의원까지 몇 대를 세습하고, 아직도 왕이 있으며, 어떤 정치적 투쟁도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우민화 정책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평범한 국민을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하게 길들였다. 공부에 대한 압박도 느끼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해도 먹고살 만한 급여를 받으며 현실에 안주하게 했다. 그저 하루하루 ‘소확행’하면서 자기 소임을 다하는 것에 치중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이치닌마에(一人前)’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일본 사회의 그 평화로움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억척같은 생명력과 남들보다 더 잘 살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욕망이, 그게 우리나라의 희망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쓰인 문서나 문장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뼈아픈 희생을 양분 삼아 다른 이를 갑갑하게 압박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하다 못해 치졸하게 싸우는 것이 희망의 맨얼굴이었다.
내가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장을 볼 때의 일이다. 엄마는 감자를 사고 있었는데 몇 개에 얼마, 이렇게 가격표가 붙여져 있었다. 시장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계산하고 있었는지 딴청을 피우고 있었는데, 엄마가 말했다.
“안 보고 있을 때, 얼른 더 넣어.”
재촉하는 엄마에 못 이겨 몇 개의 감자를 비닐 주머니에 넣었다. 야채 가게 아주머니는 계산하시면서
“아이가 넣은 것까지 합쳐서 이 가격이예요.”
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느꼈던 수치심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물건 하나를 사도 억척같이 깎으며, 깎는 것을 넘어서서 다소의 부정도 서슴지 않았던 엄마의 억척스러움을 나는 부끄럽게 생각했다.
나에게 진학과 진로를 강요하고, 항상 “할 수 있다(를 가장한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엄마는 왜 항상 내가 힘들다고 하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언제나 할 수 있다고만 하는 걸까 속이 상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애순이(아이유)가 어린 딸인 금명이의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갔다. 그런데 귤장수 아주머니가 잠을 자고 있었다. ‘귤을 그냥 가지고 갈까’하고 고민하던 애순이는 금명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눈을 보고 양심을 지킨다. 또, 금명이의 아버지는 향상 “넌, 뭐든지 잘 해.”, “수틀리면 엎어, 엎어.”라고 딸에게 말한다. 내 심성이 꼬인 것일까, 이 드라마를 판타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모르는 어떤 희망의 모습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억척스러움과 강요와 압박,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받은 사랑이 투박스러웠을 뿐이고, 지금에서는 그것이 최고의 사랑은 아니지만, 최선이었다는 것을 내가 이해하는 것일 뿐.
그 투박하고 억척스러운 사랑이, ‘남들만큼’, ‘남들처럼’, ‘남들보다 잘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어쩌면 1960년 1인당 GDP가 약 79달러에 불과하던 대한민국이 2023년 기준 약 34,000달러 수준까지 성장하며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밑바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부자’와 이른 은퇴를 꿈꾸며,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을 하기 위해 투잡을 뛰고, 자녀들의 교육에 열을 쏟으며, 아득바득 악바리처럼 사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희망일 지도 모른다.
같이 독서 모임을 하던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들한테 우리 집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나 자산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
아들이 항상 무언가를 할 때 돈 걱정을 하는 게 이상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때 금액을 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아주 이른 나이부터 인지한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본능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2007)』에서는 노동주체와 소비주체에 대해 설명한다. 과거에는 아이들이 가정에서 집안일을 돕거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노동을 경험하며 사회적 역할과 책임감을 학습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노동주체’로서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집에서 설거지하거나, 청소하거나, 심부름하는 아이들을 찾을 수 없다. 아이들을 잘 먹고, 잘 놀고, 친구 잘 사귀고, 공부하는 존재이지, 부모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은 노동주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소비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즉, 현대의 아이들은 노동 경험보다는 소비를 통해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생산할 거리가 없는 아이들은 오로지 소비주체일 때만 자신의 효능감을 얻는다. 돈을 가지고 마트에 가는 순간, 그리고 내가 가진 돈만큼 물건을 구매하는 순간, 나는 손님으로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 주체로서의 경험이 축적될수록, 무엇을 소비하느냐, 어떤 취향과 브랜드를 가지느냐가 곧 정체성이 된다. 다른 학생들이 다들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으면 따라 입어야 하고, 다들 아이폰을 가지면 아이폰을 써야 하고, 일본 여행을 가면 가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손님으로 대접받던 아이들이 학교에 오면 푸대접을 받는다. 가정에서, 가게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냉정한 태도이다. 그래서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공간이고, 여기에서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하기보다는 편한 공간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도피하지 않는 학생들도 머릿속에서는 투자 대비 효용의 관점에서 학습을 평가한다. 아이들은 내가 공부를 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배움의 공급자들(부모나 교사)에게 어떤 보상을 받을지 배움을 흥정한다.
『하류지향』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 사회가 성장·노력·성과 같은 가치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에만 몰두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즉, 일본 사람들은 더 이상 삶을 개척하려 하지 않고, 자기 취향을 만족시키는 소비자로만 머무는 하류지향적 존재가 되어간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도 거의 20년이 지났다. 지금의 일본은 어떤가? 일본의 젊은이들이 포기하는 것은 점점 늘어나 이제는 열 손가락을 가득 채웠다.
고용불안으로 장기 대출을 받을 수 없기에, 내 집 마련을 포기했고, 연애도, 결혼도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포기했다.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으니, 자녀도 당연히 남의 이야기이다. 성공에 대한 열망도, 명문대 진학도 대기업 취업도 노력하지 않는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가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가며 소비마저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예로 2024년 일본에서 유효한 여권을 소지한 국민의 비율은 17.5%이고, 2005년에는 27%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여권 소지 비율은 40%가 넘는다(뉴스비전, 2025).
일본은 장기간 내려온 엔저 현상으로 해외여행의 부담이 클뿐더러 아날로그의 나라답게 여권을 신청하는 것도, 받기도 쉽지 않다. 17.5%면 국민의 6명당 1명이니 적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출장이나 일 관련으로 해외에 나가는 사람의 수를 제외한다면 여행을 위해 여권을 소지하는 사람의 비율은 더 줄어든다.
그 해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올해 목표를 들어보면 해외여행이라 말하는 사람이 아직 많다. 학생들도 체험학습을 쓰고 (무려, 출석 인정을 받아) 해외여행을 간다. 그러나 주변의 학부모인 교사나 친구의 말을 들으니, 꼭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해외여행을 가게 되니 자녀들의 입에서 “우리는 왜 해외여행 안 가? 못 가?”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식 기 죽이는 게 싫어서 서둘러(언젠가 갈 것이니) 여행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행마저도 남들과 비교하며, 남들이 가니까 휩쓸리듯 가는 것이다.
일본처럼 욕망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가는 평온한 절망이 나은가.
한국처럼 욕망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쫓기듯 버티는 희망이 나은가.
극단적인 양자택일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뿌리는 같다. 각박한 현실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쪽을 택할 것인지, 포기하는 법을 배울 것인지를 택하는 것이다.
볼드처리된 부분은 각주처리입니다.
각주70)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2003년에 가장 유명한 일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그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1887)」(한국어 번역 제목 : 상실의 시대)을 보면 일본의 고도성장 아래 사회 불평등과 노동 문제, 미일 안보조약(Ampo) 개정 등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좌익 성향의 학생운동 단체인,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줄여 전공투라 한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68년 당시 와세다대 문학부 영화학과에 재학 중이었고, 이때 전공투 운동이 절정이었다. 도쿄대 학생들은 학내 개혁을 요구하며 야스다 강당(安田講堂)을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했으나 결국 강제 해산당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전공투 운동은 실패한다. 이런 학생운동의 한계를 경험한 일본 사회는 점점 현실 타협적이 되었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그 상실감을 소설로 나타낸 것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1887)」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