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용어 TMI - 손절5

담임추천 학비 지원을 아시나요?

by 복희

네 번째 말: 손절

- 사람도 재산, 손해보는 건 못 참지


resized_documents_300.png
담임추천 학비 지원을 아시나요?


내가 첫 발령을 받았던 도시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버스를 타면 2시간 정도가 걸리는 수도권 도시였다. 이곳의 토박이로 태어나 땅이나 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전철역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졸지에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서울에서 점점 멀리, 더 멀리 밀려나 도망치듯 이곳에 몸을 숨겼다.

소를 키우던 축사를 지나, 배 밭을 지나오면서 여기가 경기도가 맞나?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 맞나? 의심했던 기억이 난다. 6시 이전에 출발하는 첫차에도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나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7-8살이었던 학생들을 처음으로 담임했다.


그 당시만 해도 3월은 학비지원 신청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40명이 넘는 담임 학급에 한부모가정이나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을 제외한 학비지원신청자만 10명은 되었다. 지금은 무상 급식, 무상 교육이 당연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야간자율학습도 강제로 실시하던 시기(이 단어 간의 모순이란... 자율학습을 강제로라니...)라 고등학생을 둔 학부모님은 분기별로 30만원에 가까운 수업료와 별도의 학교운영비를 내고, 매달 5,6만원 가량의 점심값과 그것과 비슷한 석식비를 내야 했다. 자녀가 한 명이면 모르겠지만 두, 세 명일 경우에는 그것만 해도 상당한 돈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가정, 차상위계층에 해당하는 학생은 학비지원 대상이었지만, 그 학생들도 석식비는 지원 항목이 아니었다. 실제로 석식비가 부담스럽다며 야간자율 학습을 못 하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기초생활수급자, 학부모가정 학생들은 주민자치센터(당시에는 동사무소, 아니 거긴 읍사무소)에서 명단을 내려줘서 자동으로 학비지원을 받았지만, 나머지는 관련 서류를 내야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담임교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담임추천 학비지원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도, 한부모가정도, 차상위계층 기준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학비지원이 필요한 학생을 담임교사의 추천으로 지원 대상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대상에 포함이 안 되는 데 왜 지원하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2007년의 차상위계층 지원 기준은 가구의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인 경우로 4인 가구 기준으로 월 소득이 1,446,642원 이하였다. 사실상 이 금액으로는 4인 가족의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금액이다 보니 선정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집이나 차가 있으면 아예 선정에서 탈락이었다. 그럼 집이나 차가 있는데 왜 지원하냐고 물을 수 있다. 집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담보로 대출을 받게 되면 그 돈을 갚기 전까지는 집을 팔 수 없어서 소유해야 한다. 집을 팔아서 대출을 갚아야 하지 않냐고 또 묻는다면, 집값이 떨어져서 집을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것이다. 차 같은 경우는 생계수단(폐지 수거, 야구르트 배달에는 차가 필수이다)이라 팔 수 없어서 지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각자의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담임추천 학비지원을 신청한다. 그러나 신청한 모든 학생이 지원을 받을 수 없다. 학교별로 인원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인원이 전국에 골고루 배정되다 보니 강남에는 받을 학생이 없어서 교사나 공무원 자녀가 지원받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발령받은 곳은 지원을 신청하는 학생들이 반마다 10명은 넘었다.


이 담임추천 학비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① 학생의 주민등록 등본, ② 가족관계 증명서, ③ 의료보험증 사본 ④ 건강보험료 납부 영수증, 그리고 ⑤ 담임 추천서가 필요했다. (여기까지가 필수 서류이고, 부채신고서나 의료비 납입 영수증 같은 서류가 있으면 추가로 낼 수 있었다)


아직 미성년자인 학생들은 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를 발부받기 어려워 부모님께 부탁을 드려야 하는데, 부모님들은 첫차를 2시간 넘게 타고 서울로 출근을 해 밤늦게 들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발급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건강보험료 영수증 같은 건 당연히 모아두질 않으니 건강보험 공단에 연락해서 학교 팩스 번호를 불러주며 팩스를 부탁했다. 그나마 연락이나 잘 되면 좋은데 일이 바쁘시다 보니 전화 연락도 안 되고 서류도 안 갖춰지고 하면 담임교사인 나만 똥줄이 탔다.

자기 사정으로 신청 못 하는 거니 제출을 못 해 선정이 안 되면 스스로 학비를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학비를 미납하면 담임교사가 일일이 독촉 전화를 해서 알렸다. 그런 전화를 부모님께 하는 것도 새내기 교사에게는 고역이었다.

행정실에서는 학비 미납 학생 독촉이 오고, 학부모님께 말해도 납부는 안 되고, 학생에게 말해봤자 소용도 없고, 중간에서 담임교사만 곤란하다. 그런 일을 겪다 보니 학기초에 학비지원 받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3월은 수업이고 뭐고 전화통을 붙들고, 등본이니 가족관계 증명서니, 건강보험료 납부영수증이니 뭐니 이런 말만 계속하는 거다. (수업 준비는 언제하냐고요...)


그리고 담임교사 추천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집안 사정을 들어야 했다. 그때 세상에 그렇게 많은 불행과 불운이 존재하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있었다.

학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사업이 망하거나, 실직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고, 그것 때문에 부부 사이가 소원해져 이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일하다 보니, 건강이 안 좋아져 일을 쉬고 있거나, 일을 해도 자꾸만 빚이 늘어가는 워킹 푸어(Working Poor)인 상황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은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고, 부모들도 직업란을 공란으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40명이 넘는 학생 중에서 15명 정도는 이혼가정이었고, 드러나지 않는 재혼가정, 한부모가정과 다문화가정까지 합치면 절반이 넘었다. 그 이혼가정 중에는 빚 때문에 위장 이혼을 한 경우가 있어서 학생은 ‘아빠’ 이야기를 하는데 등본에는 아버지가 안 계시기도 했다.


또, 사실혼 관계도 많았다. 가족관계 증명서에 있는 아버지와 학생이 작성해서 낸 자기소개서의 아버지의 성함이 다른데, 이 가족은 어머니만 계신 한부모가정인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싶어 알아보면 사실혼 관계인 동거인을 ‘아빠’라고 부르다가 2학기 때는 다시 아버지(동거인)가 안 계시고...

드라마 같은, 아니면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평범한 가정에서 굴곡 없이 컸는지를 느끼곤 했다. 경북 구미에서 생각지도 않게 서울로 진학해 ‘아, 저게 진짜 부자구나.’ 하고 상대적 박탈감과 부모님에 대해 서운함을 느꼈던 나를 뼈저리게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3주 가량 학비지원과 전쟁을 끝내고 서류를 보내고 나면, 일단 학교에서 정한 차상위 기준 따라 지원이 결정되었다. 그게 항상 차상위(최저생계비) 130%-140% 정도였다. 그 기준에 해당이 되지 않는 학생들은 기준에 해당하는 학생을 다 지원하고 남은 인원에서 지원을 선정해야 했다. 그 인원이 당시 근무하던 학교 기준으로 8, 90명 정도 됐다.

많아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8, 90명을 3개 학년으로 나누고 당시 한 학년 학급 수였던 12반으로 나누면 학급당 고작 2-3명이다. 2명은 확보해 놓고 학급수로 다 돌아가지 않는 1명을 우리 반 학생으로 하기 위해 담임선생님들은 학년부 회의에서 언성을 높이고, 다른 반 선생님께 호소했다.

결국 다른 반 선생님이 양보인지, 포기인지를 하면 최종 인원이 선정되었다. 힘든 만큼 소득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건만, 그렇지도 않았다. 탈락자 학부모님께 일일이 전화를 해서 탈락을 알릴 때는 그렇게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새학기에 처음 보는 학년 담임에게(당시에는 새파랗게 젊은 여교사에게) 자신의 빈곤을 증명해야 하는 부모님들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그리고 이것을 매해 반복해야 한다. 부모님도 수고스럽지만, 담임인 나 역시도 매해 3월이 되면 거쳐야 하는 난관이다. 수고스럽게 모은 서류와 차마 듣기도 힘든 사연을 안고 다른 반보다 1명이라도 더 지원받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회의에 참여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나라에서 정한 기준과 비슷하게 정하고 만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부모님이라도 다 계시면 그냥 탈락이다. 그리고 선정이 되지 않았다는 전화를 부모님께 하면 내가 부족해서 지원을 받지 못한 것처럼 죄송하다. 지원도 못 받는데 등본이네, 가족관계 증명서네, 귀찮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가정의 굴곡, 즉 이혼과 생계의 어려움의 원인이 IMF였다는 것을 첫 학교에서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하는 강의를 듣고 깨달았다. 어째서 정신과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해주시던 말씀 중에서 가정의 해체 원인과 “이제는 부모님들이 더는 자녀가 자기보다 더 편한 학창 시절을 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우리 엄마만 해도 “지금은 얼마나 살기 좋냐, 학교 다니기 얼마나 편하냐” 같은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실제로 우리 엄마 시절에는 1,2시간씩 걸어서 국민학교를 갔고, 없는 살림에 중학교를 진학해 배를 곯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래서 항상 “내가 지금 공부했으면 너보다는 열심히 했겠다.” 같은 레퍼토리의 잔소리를 나에게 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갑자기 이 생소한 3개의 알파벳이 들리더니 그것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 간다고 했다. 주수입이 공무원 봉급이었던 우리 집은 사실상 IMF 전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실감을 못 했는데 IMF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뒤바꾼 대단한 사건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외환위기 발생 20주년을 계기로 실시한 인식조사에 결과에 따르면 IMF 외환위기가 자신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그리고 3분의 1이 넘는 사람이 IMF의 결과 우리 나라의 소득 격차·빈부 격차 확대 등 양극화가 심화했다고 대답했다.(연합뉴스, 2017).

부모님의 이혼이나 실직은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는 생각해 보지 못한 일들이었다. 그런 일들을 초등학교 때 겪은 아이들이 우리 반의 절반을 차지했다. 고용 불안과 부채에 허덕이는 부모님은 고등학생 자녀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나중에 근처 중학교에서 근무한 선생님 말을 들어보면 중학교 3학년 학생 중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학생들이 절반도 안 됐다고 했다. 당시 사회 과목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최저시급과 표준계약서에 관해 수업하면 학생들이 자기들은 그것보다 한참을 못 미친 시급을 받는다고 툴툴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받은 양육이 평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성년자인 자녀의 용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님의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학생이 스스로 용돈을 벌도록 노동으로 내모는 부모를 대신 원망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대학생 때까지 꼬박꼬박 용돈을 받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는 늦게 들어오는 부모님들은 학생들의 식사를 챙겨 줄 여유가 없었다. 학생들은 편의점 음식이나 라면 등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그래서 만성적으로 “장염이에요”, “위염이에요” 하면서 학교를 빠졌다. 그중에는 실질적 사유가 숙취인 경우도 있었고, 학교에 가기 싫어 핑계를 대는 것도 많았다.

부모님이 학생들을 잘 먹이고, 재우는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을 여유가 없으니 학생들은 늦잠을 자서 지각하기 일쑤였다. 감기를 달고 살았으며, 게임 중독이나 비행에 빠졌다.

생활고와 부모의 보살핌 부재는 학생들을 ‘어른’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게 했다. 학생들은 일찍 술을 마시고, 남녀 교제를 하고, 담배를 피고, 오토바이를 타고, 화장하는 것 같은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모방했다. 학생의 선택은 언제나 비용이 기준이 되었다. 돈에 대해서는 똑 부러지는 이 학생들을 보며 나는 이 학생들보다 지식은 더 알지 모르지만, 생활력(生活力)은 한참 떨어질 것이라고 씁쓸한 농담을 했다.

이런 가정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정 유지의 제1조건은 결국 경제력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라도 가정을 유지할 경제력이 있으면 부부는 이혼하지 않았다. 이혼하고 싶어도 혼자 아이를 키울 경제력이 없으면 참고 사는 것이다. 사랑해서 결혼한다지만, 결혼의 유지 조건은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다.

상호 간의 사랑과 존중의 실종 때문이 아니라 빚 때문에, 차압딱지 때문에 가정이 붕괴하고 해체되었다.


그러나 곰곰이 되짚어 보면, 외환위기의 영향을 나 역시 피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귀가 닳도록 주입한 안정된 직업들을 보면 그것에 대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대졸자가 환경미화원에 지원했다’ 같은 것이 뉴스에도 나오던 시절이었다. (매일일보, 2009) 그러나 고작 그 정도의 영향은 내가 담임을 맡은 학생이 받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간접경험들과 코로나 버블 시기를 지나, 이제 나 역시도 대한민국에서는 ‘돈’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이라 생각한다.



볼드처리된 부분은 각주처리입니다.


각주65) 엄마는 내가 출·퇴근을 하기 쉽도록 학교 근처에 살기 바랐는데, 학교 앞에 있는 부동산에 들어가 “여기 약국이 어디 있어요?” 하고 물으니 “약국은 없고 약방만 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 가까이 사는 것을 포기한다.


각주66) 그리고 당시 5,000원가량 하는 EBS 문제집을 사는 것도 “일주일 뒤는 살 수 있다”라고 말하며 넉넉한 기간을 주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학생도 있었다.


각주67) 아버지일 경우에는 건축일이나, 운송, 실내장식 같은 일이 많았고, 어머니일 경우는 마트, 식당, 유산균 음료 배달 같은 고된 일이 많았다.


각주68)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부모님의 성함과 무려 주민등록번호가 학교생활기록부에 들어갔다. (이는 2010년도에 사라지게 된다. 그 후에는 생년월일만 기록한다)

기억의 오류로 틀린 정보가 들어갔다. 학생의 주민번호가 기족되던 것이 생년월일로 변경되었고, 학부모의 생년월일을 기록하는 것이 선택으로 변경되었다.

과거 학교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의 주민등록번호 전체가 기재되었으나, 2009년부터 앞 6자리만 기록하고 2014년 이후에는 단순 생년월일 표기로 바뀌었다. 학부모 정보는 처음부터 주민번호를 기재한 적이 없으며, 성명·관계·생년월일만 적도록 되어 있었다. 2010년 지침 개정에서 ‘학부모 주민번호 기재 불가’가 명확히 규정되었다. 현재는 학생과 학부모 모두 주민번호가 생활기록부 출력본에 전혀 표시되지 않는다. 이 변화는 개인정보보호 강화와 전산화(NEIS) 도입이 맞물려 이루어졌다.


생활기록부에 적힌 부모는 가족관계 증명서에 기록된 사람 즉, 친모와 친부였어야 했다. 그래서 이걸 확인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가정사가 다 드러나게 되었다.


각주69) 우리 엄마가 나에게 제시한 직업은 공무원, 교사, 간호사 이 3가지였으며, 다른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전 04화학교 용어 TMI - 손절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