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지 않고 바라본다는 것
계산하지 않고 바라본다는 것
나는 나보다 전 세대인 386세대와 대화를 나눌 때, 이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이상주의자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대는 1990년대에 30대를 보냈으며, 학생운동이 치열하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도에 태어났다. 부모 세대는 누리지 못한 높은 학력을 소유하고 대학 시절 반독재, 반미, 자주·민족·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 시위,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1997년 IMF를 지난 후 학생운동은 쇠퇴했으며, 대학도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경쟁을 통해 학점을 따고, 취업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2000년대 초반 대학에 다닌 나는 할머니에게 “데모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마라. 신세 망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데모하는 선배는 없었다. 모두 수업을 열심히 들으며, 좁아진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어떤가. 안정적인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었고, 부모의 재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젊은이의 비율도 현저히 낮아졌다.
1984년생인 나는, ‘정의’나 ‘공정’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보다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얼마나 이득이 되는가’와 같은 손익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어느 쪽이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가가 기준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나와 내가 속한 계층에 유리한지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나보다 어린 젊은이, 흔히 말하는 Z세대의 가치관은 나보다 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가치관에 치우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살아갈 사회가 더 각박해질 것 같아 서글픈 생각이 든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인간관계, 사람과의 접촉과 사귐마저도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주식이나 코인처럼 수치로 계산되고 예측할 수 있는 손익의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기대를 저버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한 부분이 된다.
삶은 언제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흐르지 않는다. 어떤 관계는 시간이 지나며 의미를 되찾기도 하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따뜻한 위로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손해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섣불리 ‘손절’을 결정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거나,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방식이 더 성숙하고 깊이 있는 관계 정리의 방법일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답이 없기에, 단절 대신 유예와 성찰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유예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관계’라는 이름의 삶을,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덜 영리하고, 덜 계산적으로 바뀌길 바라본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인지, 이익을 보는 것인지에서 벗어나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따스한 태도가 늘어나길 말이다.
2025.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