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바꾸는 학교 혹은 사회 안의 학교
사회를 바꾸는 학교 혹은 사회 안의 학교
교육과 사회의 관계는 긴밀하다. 특히 공교육이라는 것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것이 교육 철학서에 나오는 것처럼 고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도 한 번 언급한 홍세화 선생님의 강의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노동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하면서 많은 농업인이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공장주로서 이런 공장노동자를 다루는 데 가장 힘든 점은 그들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는 것이었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컨테이너 위의 작업은 인간을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만들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1936)』라는 영화처럼, 인간은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업무를 쉴 새 없이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농사라는 주체적인 활동을 하던 인간은 그런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했고, 결국 탈주했다.
이런 노동자들을 길들이는 수단이 바로 ‘학교 교육’이었다. 학교는 겉으로는 배움과 성장,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내걸었다. 하지만 잠재적으로는 학생들이 지루함을 견디고, 단체에 흡수되도록 ‘길들이는 것’이 목표였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면서 수업 시간이 연장된다. 이렇게 연장되는 교과 활동 시간은 결국 일터에서 지루함을 참으면서 업무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것이다.
교사는 수업 시간이 지겨워 탈출을 감행하는 학생을 종종 만난다. 그 학생은 당연히 혼이 나고, 벌을 받는다. 고등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학생은 학교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교육받는다. 그리고 수업 시간을 견디는 연습을 한다. 그 외에도 사람과 어울리는 법, 어른과 어울리는 법 등을 배우며 사회에 적응한다. 그것이 ‘사회화’이다.
국가는 교육 제도를 통해 사회에 필요한 인력 자원을 배치한다. 그것이 교육이 사회에 가진 권리이자 책무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민은 교육이 매우 공정한 경쟁의 장이라고 생각하고, 그 결과로 인력이 배치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유명한 말이다. 돈을 가진 자는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고, 돈이 없는 자는 그 때문에 죄인이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법’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공정성이 의심될 때 자주 사용한다. 최소한 ‘법’이라는 것은 재산의 소유와 관계없이 공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지켜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은 분노한다.
한국에서는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돈을 가진 자가 그것을 이용해 상위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한국인들은 어째서인지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 자본주의에서 보면 교육에 그만큼의 재력을 쏟아붓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좋은 결과를 가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자녀 교육에 월 천만 원을 지출하는 가정의 자녀와 10만 원을 지출하는 가정의 자녀가 서로 경쟁한다고 생각해 보라. 당연히 월 천만 원을 지출하는 가정의 자녀가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인은 그런 경쟁을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공부하는 것에 있어서는 재산 정도와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상식이다. 예전의 향수에 젖은 사람은 아직도 예전 방법이 부활하기만 하면 교육의 공정함이 되살아날 것으로 생각한다.
대단한 착각이다. 우리나라 교육에는 두 가지 축이 있다. 바로 공교육과 사교육이다. 학교의 위상이 대단하던 시절의 사람들은 공교육과 사교육을 대결 구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공교육을 개혁하면 사교육 시장이 축소하거나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이제 사교육은 교육의 한 축으로 사회에 깊이 파고들었다. 사교육 시장에는 엄청난 인재들이 모인다. 학생들은 공교육의 교사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탁월하게 문제 풀이하는 강사들을 클릭 한 번으로 만날 수 있다.
또, 생활 밀착형 사교육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부모의 양육에 교묘히 파고든 사교육은, 그것 없이 자녀를 키우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공교육의 개혁을 부르짖는다. 매해 입시제도가 바뀌고, 교육 과정이 바뀌는 것은 그러한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그 요구에는 교육이 가진 공정성이 부활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 학생이 자아를 발견하고, 적성을 키우고 사회에 참여하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러나, 학교(공교육)에 원하는 것이 정말 그것일까?
과연 교육이 사회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오히려 학교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 학생을 길들이는 도구가 되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 그렇게 길들여진 학생들이 ‘이생망’이라고 푸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볼드처리된 부분은 각주처리입니다.
각주89) 1830년 전까지 정규직 노동시간은 16시간이었다,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감이 늘면 2시간 정도가 추가돼 밤 11시까지 일하곤 했다. 1830년대 이후 사람들의 시위와 혈투 끝에 그 열매로 14시간 노동시간을 쟁취했다. 1886년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19세기 후반에 주로 12시간 일하던 미국의 시카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가꾸고 싶다고 주장했다. 하루 8시간은 자고 8시간 일하고, 나머지 시간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누리고 싶다며 시위한다. 이때 구호가 ‘빵과 장미’였다. 이 과정에서 몇 선동자들을 정치범 누명을 씌워 처형한다. 이러한 역사의 궤적 속에서 1930년대 2차 세계대전 때 8시간 노동시간이 정착된다. (단비뉴스, 2017)
그리고 이에 맞춰 학교도 학생을 8시간은 지루함을 견딜 수 있도록 길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