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기자생활 Mar 26. 2022

나를 버리니 새로운 내가 찾아왔다

독하디 독한 제주도 사랑이 이번에도 도졌다. 브런치에 많은 글을 쓰지도 않았는데, 또 제주도다. 보시는 분들에겐 지겨우실 수도 있겠지만 미안할 생각은 없다! 제 휴가는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 하니깐요.


그래도 이번 제주도 여행은 과거의 여행과는 조금, 아니 많이 색다르게 계획했다. 아니다. 계획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내 MBTI는 ISTJ다. 무계획을 싫어하고, 즉흥성을 좋아하지 않는 나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자 어딘가로 떠나고자 한다면 나만을 위한 계획을 대략적이라도 세워두고 가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계획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최소한으로 계획했다. 항공편, 숙소, 렌터카를 제외하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나답지 않은 여행 계획을 세웠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여행에서 '나'를 배제시켜보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평소에 내가 했던 여행 스타일을 덜어내고자 했다. 이렇게 여행을 계획하게 된 건 갑자기 '나'에 갇힌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나는 이렇게 하는 걸 좋아하니까, 나는 이걸 좋아하니까. 항상 하는 것만 하게 됐고, 하던 대로만 행동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끝도 없을 텐데 내 관점과 스타일로만 세상을 편협하게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최근에 운동과 재테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느꼈지만 사람은 다양한 걸 경험할수록 내가 전혀 모르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평생 축구만 알고 살았던 나지만 이제 왜 미국 주식이 떨어지는지, 그 원인인지를 간단하게라도 설명해줄 수 있다. 이제 헬스장에서도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랫 풀 다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줄 수 있다. 이게 불과 1년도 안 걸려서 나한테서 일어난 변화다.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꽂히면서 이번 제주도 여행은 내 취향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다. 조용한 휴가를 보내고자 했던 내가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여자친구 있던 시절에도 찍어보지 않았던 스냅사진을 덜컥 신청한 뒤에 제주도로 출발했다. 그것도 나 혼자.  


MBTI가 ISTJ라서 그런지, 계획하지 않아서 오는 설렘보다는 무계획에서 오는 두려움이 조금 더 컸다. '스냅사진 촬영 가서 내가 망치면 어떻게 하지?, 게스트하우스 사람들이 나랑 안 맞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으로 걱정과 함께 도착한 제주도지만 여행은 아주 만족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렌터카 없는 1일차는 나에게 뚜벅이 여행의 재미를 고스란히 전해줬고,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아담한 숙소는 나에게 미니멀의 감성을 조금 설명해줬다. 낯을 가리는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과 제주도 야경 스냅사진을 찍는다? 솔직히 1년 전의 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거다. (사실 환불됐으면 도착 전에 환불했을지도 ㅋㅋㅋ) 스냅사진 작가님도 남자 혼자 신청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고 말해줬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렇게 무계획 제주도 여행 1일차는 나에게 무계획도 무계획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는 걸, 여행은 계획되지 않음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는 걸 알려줬다. 나 스스로 정해놓은 나에게서 벗어나고자 시선을 약간 돌리니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건 숙소다. 술자리를 선호하지 않는 나이기에, 처음 만난 사람들과 막 떠드는 걸 어려워하는 나이기에 게스트하우스가 왁자지껄하면 어쩌지 걱정했지만 이번 여행 최고의 선택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오랜만에 재미난 술자리를 가졌다. 'I' 성향인 나조차도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구나. 모르는 사람과도 재밌게 술자리를 할 수 있다는 걸 28살에 제대로 느끼게 됐다. 이것도 내가 규정한 나를 조금 내려놓으니 발견한 나였다.


신기하게도 '나'라는 건 내려놓는다고 해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3박 4일 동안 돌아다니면서 제주도라서 다 좋았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장소는 독립서점이었다. 무계획으로 방문한 공간이었지만 그곳은 나를 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책을 고르는 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서점이었다.


충동구매를 싫어하는 나인데, 책을 그것도 2권이나 사버렸다. 평소에 책을 자주 읽은 편도 아니거늘 게스트 하우스에 오자마자 1권을 제대로 완독했다. 오랜만에 독서의 기쁨을 제대로 맛본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이제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지만 용인으로 돌아가서도 '나'를 위해 '나'에서 조금은 시선을 돌려볼 생각이다. 독립서점의 매력도 느껴보았고, 갑작스럽게 어딘가로 떠나는 즐거움도 알게 됐다. '나'를 내려놓고 간 곳에 가면 또 색다른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생겼다는 점. 2022년 3월의 제주가 나에게 알려준 아주 고마운 진리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를 좋아한다.


오늘 읽은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알고리즘의 세상 속에서 편리함의 함정에 오래 머물다 보면 개인 취향의 스펙트럼은 점점 평균치로 좁아져버린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발견하기 위해서 끝없는 노력을 하는 여러분이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2년차 주제에 까불기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