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 Jul 23. 2021

외줄 위에 선 이

그를 위한 마음

얼마 전,

외삼촌의 감암 투병 소식을 들었다.

2년 전 어머니 칠순 가족 모임에서 뵙고, 오랜만에 병문안차 찾아뵀는데,

키가 크고 원래 마른 몸이, 더 말라 팔다리에 시퍼런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삼촌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약봉지와 냉장고를

가득 채운 몸에 좋다고 하는 음식들이 지금의 삼촌의 아슬아슬한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다녀와 두통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때, 삼촌 결혼 전에 잠시 우리 집에 함께 살았다.

매일 같이 밥 먹고 생활하며 겪은 외삼촌이 편하지 않았다.

잘 웃지 않았고, 키가 커서 그랬는지 위압감이 느껴졌다.

어느 날, 나이에 맞지 않는 말을 어디서 배워 생각 없이 삼촌 앞에서 뱉었다가

혼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삼촌은 젊고 건강했다. 그때는. 누구나 그렇듯.


내가 살았던 시골은 섬이다. 그 섬은 나의 놀이터이자 세상의 전부였다.

시골에 사는 어린 나에게 반복되는 일상, 특별할 것 없는 놀이와 풍경들.

그러다, 환절기 즈음,  꽃상여의 장식들이 바람에 하늘 거리고,

슬프지만 내게는 슬프지 않았던 모습들,  상여가 가족을 이끌고, 갯 바람을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았다.

어느 산 경계에 머물다, 사라질 때까지 동네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의 구경거리였고, 특별한 놀이였다.

어릴 적 소독차를 따라다니듯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여가 동네를 돌 때, 감정적 혼돈 속에서 슬픔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었다.

동네 사람들이 담 너머에서, 골목골목에서 슬며시 몸을 내밀었고,  상여 주변으로 모여들어 구경하였다.

우리 성씨가 많이 사는 집성촌이라, 얼굴은 잘 모르지만 친척이라는 분들, 그중에 어머니나 할머니 나이쯤 되어 보이는 분들이 함께 슬퍼해주셨다.

나는 이것이 마치 슬픈 마당극 속의 주인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들 우리의 슬픔을 자신만의

감정과 표정으로 구경했다.


줄타기는 위험하다

이를 능숙하게 해내는 이도 있지만,

바닥을 걷는 것과 천지 차이이기에, 자칫 실수하면 줄에 모양 빠지게 매달리거나,

힘내서 다시 줄 위에 올라타 끝까지 완주를 하거나,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무서우면 안 타면 그만이다.


쉽지 않은 병에 걸리는 순간 외줄 위에 서는 것과 같은 듯 다르다.

대부분이 처음이고, 거부할 수 없으니까.

가야 하고 삶이 허락하는 지치더라도 인내하고 전진해야 한다.

포기하면 자심 매달리다 그냥 떨어지니까.

다시 기회가 없으니까 말이다.


오늘 나는 기도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누군가의 삶이 의사의 손에 달렸다 믿는 사람들이 많으나,

내가 믿는 하나님께 겸허히 삼촌의 삶(의 연장)이 주는 의미에 대해

내 소원을 청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철갑을 두르지 못한 소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