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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 Sep 08. 2021

미리 쓰는유서 1

끈질기게 들러붙어있는 엿 같은, 고통이라는 이름의 만성 피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필사하기 좋은 문장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던 중 우연히 발견한 문장이었다.

뭐라고 형언할 없는 허무함, 외로움, 고통이 느껴졌다.

 

지난 5월 마음이 많이 무겁던 어느 날, 두툼한 노트 한 권을 샀다. 그의 첫 문장을 내 삶의 끝자락의 선언이라도 되는 양 표지 바로 다음 장에 적었다. 나이 먹고 사춘기가 다시 찾아 온건 아닌가 잠시 의심도 하였다. 노트는 일기장이자 유서 모음집이 되었다.


'첫 번째 유서'라는 제목과 날짜를 적고,  텅 빈 공간을 응시하였다. 유서라 생각하니 어떤 자음으로 첫 글자를 시작할지도 몰랐다.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어서였는지, 내 어휘력이 죽음에 대한 상상력을 받쳐줄 만큼 넉넉하지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죽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언젠가 갑자기 죽게 되어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유서나 유언 없이 사라진 망자로 기억되는 것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유서라는 단어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영원한 이별'이라는  설지만 확정된 미래와 마주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물음들이 손끝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다.


고통의 끝이 있을까?

고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고통은 나의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념들이 짓 누르는 데서 오는 집착의 결과인가?


필사를 잠시 접고 나니 글들이 눈에 밟혔고, 그 글들은 내가 펜은 잡도록 충동질하는 듯했다.

오늘 밤도 나는 광인처럼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향해 내 손을 휘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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