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ENTYPES.TTF
우선 나는 폰트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저 내 가던 길에 나온 부산물을 잘 주워 정리해서 어쩌다 보니 회사 폰트로 만들어냈다. 되돌아보니, 내게 좀 즉흥적인 기질이 있는 듯하다.
본래는 "한글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싶다"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디어의 시작은 작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점점 일을 크게 저지르고 있었음을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나쁜 버릇 고치기도 참 어렵다는 것을 조금 더 많이 지나서 알게 되었고.
말이 잠깐 딴 길로 샜다. 내가 좀 산만하다.
다시 돌아와서, 그 아이디어를 개발해보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니, 들어갈 비용이 꽤 크겠다 싶었고, 그래서 정부 지원을 여러 차례 시도한 결과로 어찌어찌 선정도 되고, 좋은 일이 생기려니 시기적절하게 뜻밖의 동업자도 만나게 되고, 그렇게 잠시지만 모든 게 술술 풀리던 짧은 순간이 있었다. 술술 풀린다고 편했다는 건 아니다.
사업은 잘 풀려도 고생이요, 안 풀리면 개고생이다.
서비스 이름을 고민하면서 대학원의 지도교수님이었던 시모네에게 어떻게 브랜드 네이밍을 하면 좋을지 조언도 구했다. 몇가지의 키워드를 받아 들고 와서 혼자 고민 끝에 결정한 OREINTYPES. 그리고 한글그림이라는 서비스에 어울리도록 ORIENTYPES에 특별한 상징성을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작가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에 한글그림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있던 김유래 씨에게 찾아가 내 생각과 의도를 설명했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모티브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기에 신라 금관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디자인한 시안을 보았을 때 잠깐이지만 난감했다.
잠깐의 당황 뒤에 든 생각은 아, 운명인가?
짧았지만 김칫국을 드링킹하는 순간이었다. ㅋㅋㅋ
이래뵈도 우리 집안은 신라시대 왕가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로고를 보는 순간, "내가 의뢰할 때 어떤 암시를 주었던가"하고 잠시 의심했다. 내 입으로 말한 적이 없었을텐데, 일 얘기하러 가서 초면에 ‘제가 신라 왕가의 후손입니다’라는 얘기를 하는 건 너무 이상하니까. 예술가라 예민하게 내 무의식을 포착했나 싶기도.
그와는 별개로 로고 자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막상 사용해보니 로고의 확장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그 특별한 개성이 주는 불편함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 한편에는 “언제 시간이 나면 응용해서 로고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고쳐봐야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1인기업을 운영하는 현실에서는 그럴 만한 시간이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부의 마케팅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로고를 리뉴얼 할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그 일을 의뢰했다. 이러쿵 저러쿵 설명하니 로고가 나왔다. 툴툴대며 해줬던 거 같다. 아, 돈도 받으면서, 난 성격상 저러지 못하는데, 나도 프리랜서로 일할 때 좀 튕겼어야 했다.
이때에는 영문 버전도 의뢰했다. 그렇다, 한글그림 서비스라고 한글 버전만 개발했지만, 사실 이 서비스의 고객은 세계인이지, 한국인 대상이 아니었다! 하핫. 그래서 매번 로고 밑에 영문을 표기해야 했다. 참 여러모로 생각이 짧아도 한참 짧은 인간이었네, 내가.
바뀐 로고는 기존 로고 형태와 컨셉을 모티브로 해서 발전시킨 것이다.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어찌보면 서양의 궁전의 탑 모양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신라 금관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금관에 달려 있는 잎새나 옥구슬의 형상이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자니, 폰트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배달의 민족에서 만든 여러 서체들에게서 자극을 받아서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회사 내 디자이너에게 이 로고들 응용해서 알파벳 세트로 확장해보라고 했다. 본래의 일을 하면서 짬짬히 하던 거라 시간은 제법 걸렸다. 그래도 완성은 되었다.
우리 디자이너가 기특하게도 글자에 사용된 디자인 요소들을 활용해서 심벌까지 만들었다. 그녀가 보기에 바뀐 로고 디자인에서 왕관이 연상되었나 보다. 정말 신라 왕관으로 심볼을 만들었구나. 남이 보면 자기 조상이 신라 왕족이라고 해서 기어이 심벌을 저거로 만들었구나 싶을 듯. 하지만 나는 입도 벙긋 안했다. 디자인해오면 잘못된 부분이나 잘한 부분만 체크했을 뿐.
디자인이 다 되었다고 바로 폰트가 되는 건 아니다. 일러스트 파일로 존재하는 상태로 꽤 오랜 기간 쓰였다. 회사 자체 디자인 제품이나 홍보물 제작시에 쓰는 등 쓰임새가 아주 좋았다. 그러던 와중에 디자이너는 퇴사를 했고, 나는 나대로 계속 사업하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중에 틈틈이 내가 이어받아서 조금씩 기호 문자 등을 추가해나가며 글자들의 부족한 균형점이나 무게감 등을 수정하고 있었다. 폰트 프로그램인 폰트 크리에이터(FONT CREATOR)를 이용하면 하나하나 이미지로 앉혀서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글자와 문자들 간에 균형감과 무게감들의 차이가 그것이다. 그런 것들을 수정하는 건 특별히 창의적인 작업은 아니지만,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폰트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은 사용하기 쉬운 편이었지만 디자이너가 툴을 다루는 데 있어서 서투른 편이었고 또 중간에 퇴사를 했기에 어쩌다 보니 최종 마무리는 내 몫이 되었다.
이렇게 폐업한 디자이너인 나까지 포함해서 총 4명의 디자이너가 참여했던 ORIENTYPES 폰트가 완성되었다!
이후에 사업하면서 내가 진행한 것 중에 ORIENTYPES 폰트는 꽤나 뿌듯한 것이 되었다. 폰트로서의 완성도나 가치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orientypes 폰트가 의외로 제목으로서 폰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써서 안 어울리는 경우를 못 봤고, 회사 제품 디자인하고 간판을 만들 때 고민없이 오리엔타입스 폰트를 쓰면 돼서 너무 편하다.
배민은 무료로 폰트를 배포하고 있지만, 나는 개발하느라 걸린 긴 시간을 생각하며 애정을 담아 유료폰트로 팔고 있다. 팔리던 말던,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물론 무료 폰트도 잘 찾아보면 어디선가 다운로드할 수 있다. ^_*
P.S. 이 글을 쓰면서 앞으로 내가 나아갈 바랑 크게 상관없을 경험인데 써도 되나 고민했다. 게다가 심지어 디자인 제품 회사도 아닌데, 먼가 불안할 때마다 하나씩 만들었던 것같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며 고장 난 마음을 고치려는 의도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