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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훈 Nov 30. 2021

인간, 도시, 사회

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 가는 거예요.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큰 이변이 없다면 내년 3월, 대학원에 입학한다.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박사과정 진학을 1년간 고민했었다. 실리적으로 박사과정 진학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고,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 박사과정 진학을 결심했을 때 각오하거나 감수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아득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의지다. 박사과정을 취득한다고 해서 나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다. 회사에서 박사학위에 필요한 학비를 지원하거나 시간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박사학위자에게 별도의 수당을 지급하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스스로 동기부여하며(self-motivation) 학업을 지속하는 일은 무척이나 외롭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석사과정에서 이미 경험했다. 두 번째는 시간이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업무시간(09시~18시)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잘게 쪼개어 공부시간으로 할애해야 한다. 운동은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하고,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기 위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해야 한다. 지금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퇴근하긴 어려울 것이다. 세 번째는 돈이다. 대학원 과정은 학교마다 크게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학기당 250만원에서 900만원까지의 학비가 든다. 게다가 전공서적 구매비용과 교통비, 시간 절약을 위해 학교 근처에 임시 거처를 구하는 비용까지 고려하면 상당한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상술한 의지와 시간, 돈을 투자하면 제법 실효성 있는 자격증 취득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안온한 일상에서 수시로 틈탔다. 하지만 결국 박사과정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몇 가지 학교와 전공을 선택지에 놓고 고민했다.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연구자(교수)가 학교와 전공에 있는지'였다. 이 밖에도 나의 커리어와의 연계성, 학비, 학교의 네임밸류, 물리적인 거리 등을 함께 생각했다.

또한 석사과정 진학에서도 겪었던 고민이지만, 회사 업무와 관련이 있는 예술경영을 전공으로 선택할지에 대한 결정이 선행되어야 했다. 예술경영 전공이 있는 학교가 한정적이므로 이 분야로 진학을 결심할 경우 학교 선택의 폭이 크게 제한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술경영을 전공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첫째로 예술경영은 실무적 성격이 강한 학문인데, 나는 회사에서 예술경영(행정) 실무를 직·간접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다양한 경로로 해당 분야의 강의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므로 배움의 장소가 학교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예술경영은 다른 학문과의 학제 간 교류를 통해서 발전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내가 예술경영 분야에서 일하고 전공하면서 한 분야에 매몰되기보다는 다른 전공을 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고 학제 간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예술경영 전공을 배제하고 학비를 기준으로 학교와 전공을 추렸다. 실리적이지 않은 목적으로 공부하는 만큼, 경제적인 부담이 된다면 학업의 지속에 제한요소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국공립 대학교를 중심으로 검토를 시작했다.

첫 번째 후보는 서울대학교에서 석사와 같은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이어나가는 방법이었다. 학비도 합리적이고 학교와 회사의 거리가 가까우며, 우수한 학교 인프라 활용이 가능하고 시스템에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다만,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없다. (아마도 서울대학교 모든 전공을 찾아봐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심층적일 필요가 있는 박사과정 연구의 진행에 어려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후보는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전공으로는 경영공학부(서울)와 문화기술대학원(대전)을 고려했다. 주요 장점은 짜임새 있는 커리큘럼과 우수한 교수진, 그리고 저렴한 학비와 장학제도였다. 하지만 알아본 결과 위 전공의 경우 비전일제(part-time)에 대해서 보수적이라서 진학을 위해서는 휴직이나 퇴사가 불가피했으며, 나의 커리어와의 연계성이 떨어지고 서울대학교와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분야의 선행 연구자가 없었다.

세 번째 후보는 서울시립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서울시립대는 행정과 도시, 건축분야가 우수하며 공공성을 강조하는 학교이므로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도시사회학과 교수님 중 한 분께서 도시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오래전부터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석사과정 논문을 준비하면서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연구분야보다는 학교의 네임밸류와 인프라가 중요하다며 선택을 만류하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학비가 국내 최저 수준이고 학교의 특성화 분야와 도시사회학이라는 전공이 나의 커리어와 잘 이어지며, 알아볼수록 희망하는 연구 분야를 수행함에 부족함이 없는 학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화도시의 방향성, 문예회관 수요의 시론적 분석, 문화정책의 광역적 연계 방안' 등의 주제를 연구하시는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님께 메일로 연락을 드렸다. 도시와 문화예술의 관계를 문화사회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문화도시 분야의 권위자시고, 예술의전당을 포함하여 문화예술기관의 평가와 자문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으신 분이었다.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은 뒤 직접 찾아뵈었다. 교수님께 학교 커리큘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지도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선택에 확신했다.

그렇게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지원했을 때 면접에서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았다. “김영훈씨는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문화예술기관에서 종사하고 있는데 사회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것이 어떤 맥락인가요?”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으므로 즉흥적으로 대답했는데, 나의 목표가 문장에 제대로 표현되어서 만족스러웠다. “건축은 인간 개인을 연구하며, 도시계획은 인간 집단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사회학은 인간이 모여서 구성한 사회를 연구합니다. 즉, 나의 공부는 개별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와 문화예술, 그리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사회적 행위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되는 여정입니다.” 


간혹 예술경영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인물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예술의 관계성을 간과하고 예술을 독립적 객체로 인지하는 경우를 목격한다. 하지만 문화예술은 인간으로부터 기원하며 도시, 사회와 관계하며 존재한다. 즉, 인간으로부터 집단, 그리고 사회적 행위에 대해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예술경영 연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필수적이며, 도시와 문화예술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하는 나에게 가장 원칙적인 경로이다.

또한 예술경영은 다른 분야와 학제 간 교류가 확대되어야 하며, 이러한 교류를 갈무리하기에 가장 적합한 전공은 사회학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 구조를 문화라고 하고, 문화의 한 부분으로 예술활동과 그 성과의 총칭이 예술의 정의라고 했을 때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연구하는 사회학은 문화와 예술의 상당 부분을 포괄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문분야나 예술경영과 접점을 갖겠지만, 그것들의 교집합에는 사회학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서울시립대학교의 전공명인 도시사회학과는 원래 범위가 방대한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도시라는 단어가 접목되어 마치 모든 연구분야를 담을 수 있는 그릇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나의 건축과 도시계획이라는 학문적 배경과 문화예술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실무적 경험, 그리고 도시와 문화예술의 관계라는 관심 연구분야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전공이 도시사회학이라는 것에 확신한다. 또한 이런 전공에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를 앞서 연구하는 교수님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글로 쓴다. 내가 왜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어떤 생각의 경로로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는지를 정리하는 과정이 이후 비슷한 고민에 다다랐을 때 시행착오를 줄이고 스스로가 나약해질 때 다시 한번 동기를 부여하리라 믿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사와 석사, 박사과정 모두 다른 학교에서 다른 전공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먼저 공부했던 선배들이 가장 추천하지 않았던 선택이다.

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는 밈이 있었다. 연거푸 다른 학교와 전공으로 공부하는 고행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나의 대학생 시절 나태함이 제법 무거운 잘못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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