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문화공간, 플레이스 막
(예술경영지원센터 웹진 기고문, 2015.08.06)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도시 환경이 변하면서 중·상류층이 도심의 주거지로 유입되고 이로 인해 주거 비용이 상승하면서 비싼 월세 등을 감당할 수 없는 원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1964년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R. Glass)가 노동자들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이주를 해 오면서 지역 전체의 구성과 성격이 변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지주계급을 가리키는 젠트리(Gentry)가 접두사로 쓰인 것은 근대 자본주의 초기의 인클로저(Encloser) 운동에 따라 영국 지주들이 대량의 양모 생산 및 대규모 공업화 농업을 위해 자영 농민을 울타리 바깥으로 몰아낸 것과 흡사한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우선 임대료가 저렴한 도심에 독특한 분위기의 갤러리나 공방, 소규모 카페 등의 공간이 생기면서 시작된다. 이후 이들 상점이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면서 유동 인구가 늘어나고, 이에 대규모 프랜차이즈가 입점하기 시작하면서 임대료가 치솟게 된다. 그 결과 소규모 가게와 주민들이 치솟는 집값이나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동네를 떠나게 되고, 동네는 대규모 상업 지구로 변화된다. 2000년대 이후 서울의 경우 종로구 서촌을 비롯해 홍익대 인근, 망원동, 상수동, 경리단길,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 등에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연남동의 정비는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지어진 오래된 연립주택이 여전히 주거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주택들은 정해진 방향과 경계선이 없는 듯 삐뚤빼뚤하게 배치되어 있다. 계획적으로 동시에 발생하지 않고, 개인의 욕구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게 아닐까. 그래서 연남동은 골목골목의 길 모양이 다르다.
연남동 골목의 연장선인 동진시장은 버려진 공간이었다. 시장으로서 기능을 잃은 동진시장은 인근 가게의 창고처럼 쓰였다. 이곳을 예술가들이 살려냈다. 허름하고도 친숙한 시장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 모자란협동조합, 덤스터, 마르쉐 세 팀이 내부를 개조했다.
이제 동진시장에선 라오스의 천으로 만든 공예품과 버려진 목재로 만든 가구를 판다. 근처 텃밭에서 기른 농산물과 연남동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이 만든 반찬을 판다. 그리고 시계를 수리하고 직접 만든 장신구를 판다.
그리고 동진시장과 동진시장 인근에 ‘플레이스 막‘과 ‘막사‘가 있다. 연남동 시각예술전시공간, ‘플레이스 막’과 ‘막사’는 다채로운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공간이다.
‘플레이스 막‘에선 젊은 작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 김구림 작가의 개인전 <사라진 아름다움>이 열리기도 했다. 또한 동진시장 내부에 있는 공연 공간 ‘막사’에서는 연극 <모럴 패밀리>를 비롯한 실험적인 공연들이 계속되고 있다.
‘플레이스 막’과 ‘막사’는 스스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플레이스 막과 막사는 그대로 막장이다. 지금 바로(막) 무엇인가 마구(막) 펼쳐질, 막(幕)을 올릴 수 있는 장(場), 막상(막) 전시를 보러 가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어떤 막(膜)에 현기증을 느끼는 대중들을 위해 플레이스 막과 막사는 순수하고 거침없는 막(幕)을 올릴 것이다. 막은 이런 성향을 지녔다. 주저 없고, 거칠지만 대중이 자진해 걷어치울 수 있는 막이 되고자 한다. 막을 걷어 안을 들여다보곤 그곳에서 그들의 예술적 수많은 양상을 찾아 꺼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플레이스 막과 막사의 미션이다. 대중들과 예술을 나누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술계는 동인끼리의 장, 잔존해 있는 엘리트주의 등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예술 소외에 익숙해진 사람의 단기적 허세 의식을 채우기 위한 미술 서비스로 공간도 관람객들의 풍부한 감상의 폴도 쇠퇴해 버렸다. 플레이스 막과 막사는 앞서 이야기한 것들에 대해 대안적인 의의를 갖는다. 연남동이라는 주거지역을 연고지로 삼으면서 예술 불모지에서의 부족한 예술 향유를 해소하는 역할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갖게 되었다. 2010년 6월부터 시작된 플레이스 막과 막사는 다채로운 기획 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채워 나가고 있다. 예술공간을 다소 불편하게 여기던 기성세대에게는 감상을 대화로 풀어내며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는 전시 공간에 대한 이질감의 박탈과 학교 밖 배움의 공간으로 꿈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플레이스 막과 막사를 운영하는 유기태 대표는 과거 홍대 인근에서 갤러리 술집인 ‘바닥’을 운영했었다. 술집에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며 독특한 공간으로 입소문이 났고, 월세가 세 배 이상 올랐다. 더 이상 운영이 힘들어지자 옮긴 곳이 연남동이다. 또한 연남동에서도 플레이스 막의 운영비를 위해 ‘토끼바’라는 술집을 함께 운영했다. 그리고 ‘토끼바’는 또 다른 실험공간인 ‘막사’를 위해 처분했다.
‘플레이스 막’의 유기태 대표는 그가 경험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예전에는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내가 가는 곳에 투자해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미국의 소호나 첼시를 봐도 문화와 예술이 돈을 몰고 다니는 것 같다.”
이제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 찾아온 연남동에도 젠트리피케이션이 찾아왔다. 이미 연남동 동진시장 부근의 세가 크게 올라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그는 또 다른 장소를 준비 중이다.
한국형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순화할 수 있을까. 자본과 욕망에 의한 도시의 변화라는 의미의 ‘도시의 세속화’, 다름이 없게 만든다는 의미의 ‘도시의 획일화’, 문화가 사라져가는 도시를 의미하는 ‘도시의 사막화’ 등이 떠오른다.
건축평론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도시를 사막으로 만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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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엽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같은 대도시가 19세기부터 형성된 다양한 생활 질서를 네모반듯한 직선의 대로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할 때,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일상 속의 ‘불가사의한 질서’, 그러니까 ‘미묘하고도 복잡한 질서’가 도시의 생명, 그 자체라고 강조한 적 있다. 그는 그의 저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래된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외견상의 무질서 아래에는 거리의 안전과 도시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사의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것은 복잡한 질서이다. 이 질서의 본질은 끊임없는 얽히고설킨 보도(步道) 이용과 그 결과물인 끊임없는 보는 눈의 연속이다. 이 질서는 이동과 변화로 이루어지며, 비록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생활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도시의 예술 형식이라는 공상적인 이름을 붙이고 춤에 비유할 수도 있다.”
20세기 제이콥스의 주장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대학로, 홍대, 서촌 등을 찾아가 자발적 미학을 통해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그 자리엔 소비와 자본만 남았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내·외국인을 위한 획일화된 관광지로 전락했다. 자신들의 땀과 노력의 결과는 높은 임대료로 돌아와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지나가는 이에게 도시가 이런 모습이라면, 그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저런 모습이 될 겁니다. 그건 처음으로 도착하는 도시일 수도 있고 한 번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도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도시는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미 다른 이름으로 이레네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는 이레네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칼비노(Italo Calvino)는 그의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도시를 묘사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도시의 가시적이고 고정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다.
도시에 건강한 긴장과 균형을 부여하는 것은 도시에 사는 사람이다. ‘플레이스 막’과 ‘막사’가 앞으로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도시에 다양성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공간으로 지속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