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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K에게.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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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Jan 14. 2022

꿈의 해석(2)


‘꿈’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다른 하나는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그리고 사람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어린 시절에 꿨던 꿈을 계속해서 밀고 나가는 사람. 예쁜 꿈으로 남겨둔 사람.

내가 가졌던 최초의 꿈은 흔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남자 어린이는 태권도 학원을 다니고 여자 어린이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 지금이야 ‘남성 직업’ ‘여성 직업’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분홍색’이라는 말이 말도 안 되는 성 차별적 단어로 여겨지는 시대지만 인간은 옳지 않은 것을 고쳐내는 좋은 습성이 있으니까, 옳지 못한 과거의 시절은 분명 있었다. 그리고 옳지 못한 과거에서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낸- 6살 여자아이의 꿈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 음계를 접했던 날만큼은  인생에서 가장 잊기 힘든 기억 일거다. 정확히 말하면 음계를 접했다기보다 건반에 손가락을 갖다  것이었다. 나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남녀가 관계를 맺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오르가슴과 흡사한 희열이었다. 아직은 꿈이라는 것을 갖기 . 아직은 성적 쾌락의 경험이 없을 .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이상한 느낌을 겪은 그날의 나이는 고작 여섯 . 처음으로 손가락을 갖다  건반은 나중에 알고 보니 ‘이라 불리 우는 () 이였다.

부유해 보이는 2층짜리 벽돌 주택에 살았는데, 모든 것이 다 있을 것만 같은 집에 딱 하나 없는 게 ‘피아노’였다. 내가 처음 ‘솔(G)’의 소리를 낸 건반은 멋진 그랜드 피아노가 아니라 흰건반이 29개뿐인(검은건반은 20개)- 일본에서 건너온 키보드(CASIO TONEBANK MA-120)다.


건반은 현실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다시 도. 이름은 같은 ‘도’인데 더 높은음이 나는 ‘도 ’가 존재했다. 계속해서 다음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느낀 세계의 확장.

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는 들리는 음악을 건반으로 표현해내는 것에서 나아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작곡’이라 불리 울 만한 행위다. 나는 더 높은음. 때로는 더 낮은음을 필요로 했고, 흰건반이 29개뿐인 키보드는 더 이상 나를 감당해내기 어려워졌다. 엄마는 그 길로 내 손을 잡고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골목의 끝에 위치한 피아노 학원에 데려갔다. 어린 눈에 비친 ‘피아노 학원’의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알록달록 엄청난 수의 어린이 신발들이 포대자루에서 막 쏟아낸 것처럼 흩뿌려져 있었고, 흩뿌려진 신발들이 연주해내는 건반 소리는 반대편 골목의 끝까지 들릴 정도로 웅성댔다. 이건 다시 생각해도 과장이 아니다. ‘연주’ 라기보다는 ‘건반의 웅성거림’으로 들렸다. 피아노에서 나오는 선율을 좋아했지만, 시끄러운 건 질색이었다.

악보 보는 법, 페달을 밟는 법, 무궁무진한 음악의 세계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다른 아이들 틈에 섞였을 뿐 쿵쾅대며 연주하는 아이들 특유의 피아노 소리는 정말 별로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단 한 명의 아이도 없을 시간대를 골라서 레슨을 받았다. 저녁 여섯 시 즈음 시작하여 일곱 시 정도 끝나는 게 보통인데, (아이들이 돌아간 후 선생님 혼자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 언제나 일찍 도착해서 연주를 감상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목소리를 낼 용기도 없는 나는 습관처럼 헛기침을 두어 번 정도 한 뒤에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신발장 앞에 앉아있는 나의 작은 등 뒤에서 울리는 선생님의 인사가 좋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이 펄펄 끓는 날이나, 학교는 안 가도 피아노 학원만큼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는 나를- 엄마는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너는 이담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는 물음에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하고 말했었다. 내 인생에 가장 꿈같고 아름다운 얘기다. 예쁜 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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