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의 배터리로 살아가는 고도민감자(HSP)의 고백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을 때면 늘 상대의 표정, 말투, 목소리, 제스쳐, 미세한 호흡의 떨림까지 자동으로 검열되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이 모두 읽히면 나의 자아는 늘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늘 타인에게 맞춰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아왔다. 좋게 포장하면 ‘섬세한 사람’, 현실은 타고난 감각이 ‘지독히 예민한 사람’.
그러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모든 SNS에 유행처럼 번지는 HSP*라는 한 단어를 만났다. 내가 HSP인지 아닌지에 대한 테스트도 인터넷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데, 역시나… 나의 테스트 결과는 98퍼센트의 고도 민감성 HSP로 판명되었다.
(*HSP : Highly Sensitive Person, 신경 시스템이 예민하여 자극을 깊게 처리하고 타인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며 물리적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뜻함.)
물론 질병이 아닌 타고난 기질일 뿐이지만, HSP로 살아가는 것은 꽤나 고달프다. 특히 SNS라는 비대면 연결의 세계에선 더더욱 고통스럽다. 단톡방에서 던진 나의 메시지에 그 누구도 답장이나 반응이 없거나, 멤버들의 메시지가 공중에 붕 뜰 때, 나의 뇌 회로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답장이나 반응이 없지?’, ‘저 친구는 지금 얼마나 무안할까?’ 등. 이렇게 타인은 기억조차 못 할 찰나의 침묵을 오랜 시간 곱씹으며 반추한다.
하루는 나와 10년을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나의 이런 생각 회로를 처음으로 고백했다. 친구는 경악했다. “진짜? 전혀 몰랐어. 넌 늘 밝게 잘 웃으니까. 그렇게 피곤해서 어떻게 살아?” 맞는 말이다. HSP의 하루를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일반인들이 배터리 효율 100퍼센트의 새 스마트폰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HSP는 아무리 충전해도 배터리 효율이 60퍼센트인 오래된 스마트폰으로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즉 남들이 100퍼센트의 넉넉한 인생 에너지를 누릴 때, 나는 늘 방전 위기를 넘기며 줄타기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가끔은 참 억울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연말, 회고 모임에서 만난 한 분이 내 오랜 억울함을 단 한마디로 위로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예민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제 옆엔 항상 늘 저와 함께하는 보이지 않는 유령이 있어요. 저는 항상 어떤 말이나 표현을 하고 나서 상대방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계속 반추하고 생각하게 되어요. 내가 뭘 잘못한 건 없을까, 내가 표현한 게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생각해요.”
즉, 그 유령은 내 옆에도 늘 24시간 있는 ‘타인’이었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표현하던 상대가 어떻게 느꼈을지, 혹시 상처가 되진 않았을지 끊임없이 반추하게 만드는 존재. 나와 평생을 함께한 ‘지독한 예민함’이 ‘유령’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순간, 묘한 위로가 찾아왔다. ‘예민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차가운 서늘함이 ‘유령’으로 치환되었을 때 서늘하지만 내가 안고 가야 할, 나와 동행할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만 이 유령과 동행하는 게 아니라는 동질감도 내 마음에 따뜻한 응원이 되어주었다.
유난스러운 예민함을 가지고 태어나, 하루하루를 유령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 세상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은 타고난 본성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인생의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아니다. 그냥 유령을 내 옆자리에 앉혀놓고 함께 공존하는 법을 익히는 것. 결국 해결책은 내 예민함을 결핍이 아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거다. 인간은 타고난 본성을 이길 순 없지만, 본성과 친구가 될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 유령은 내가 세상을 더 섬세하고 깊게 읽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
「주피의 음악편지」
‘피터팬 컴플렉스 - 산책의 간격'
에세이의 여운과 함께 들어보세요♪
(TBS 주용진 라디오PD와 매주 함께 연재중)
삶에서 간격이란 참 중요한 거 같습니다. 멀게는 지인과의 거리일 수도 있고요, 가깝게는 친구와의 거리, 가족과의 거리도요. 물론 제일 중요한 건 나와의 거리이겠죠.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으니까요. 사람마다 곁을 내어주는 방법과 그 거리는 다릅니다. 각자의 공간 속에서 서로를 지킬 필요가 있죠. 나로부터 나를 지킬 필요도 있구요.
이 노래는 그만큼만 곁에 있어 달라고 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거리죠. 그만큼만. 딱 그만큼만. 당신과의 거리. 나와의 거리. 유령과의 거리.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우리에겐 그 간격이 제일 필요한 게 아닐까요.
https://youtu.be/0weJ7nFBijo?si=cRZ8i6QYDsUy6K5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