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실수록 선명한 그림자

by 김윤슬

현관문을 닫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늘 젖은 솜이불처럼 바닥으로 쳐진다. 세상에 나의 책임감과 밝음을 다 내어준 값을 치르듯. 나는 책임감이 전 지구에서 가장 강하기로 유명한 ‘K-장녀’다. 누군가에게 ‘책임감이 강하다’는 말은 큰 칭찬이겠지만, 나에겐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상황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 ‘괜찮은 나’를 연기해야 하는 지독한 의무이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엄마는 내게 그 의무를 충분히 감당해 낼 만큼 고도의 밝음을 유전자에 함께 탑재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연기를 완벽히 해내며 ‘밝은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내 이름 앞에 붙일 수 있었다.

내가 6년 가까이 항공사에서 서비스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 눈부신 유전자 덕분이었다. 승객의 무례한 언행은 나의 밝음이 항공기 이륙과 함께 날려주었고, 때로는 그 에너지가 과해 승객에게 친구처럼 다가가 서비스를 제공해 드린 덕에 칭찬 레터를 자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퇴사 후 항공사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위해 강단에 섰을 때도 나는 ‘밝은 기운을 주는 강사’로 통했다. 강의평가엔 늘 ‘선생님의 밝은 기운 덕분에 힘든 취업 준비 기간을 버틴다’라는 수강생들의 후기가 즐비했다. 그러나 밝은 빛 뒤엔 그림자가 함께하는 법. 내가 빛을 사용하는 만큼 내 마음속 그림자 또한 언젠가부터 소리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책임’이라는 이름의 성실한 형벌이 그 뒤에 늘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살겠다며 잘 다니던 항공사를 그만두고 1인 사업을 시작했을 때, 세상일은 언제나 그랬듯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는 또래들만큼 수입이 모이지 않는 달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내 자신을 스스로 갉아먹었다. (부모님은 내가 또래들보다 수입이 적다고 비난한적도 없는데 말이다…) 또한 밝음으로 긍정적인 강의 평가를 받았던 강단도 사실 나에겐 지독한 연극무대였다. 수업을 하는 120분 내내 수강생들의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에 안테나를 세우며 내 컨디션과 상관없이 나는 늘 밝은 에너지를 연기해야 했다.

K-장녀로서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된다는 책임감 만큼, 수강생들에게 수강료를 받았다는 책임감 만큼, 딱 그만큼 나는 기어이 밝아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는 의젓한 장녀, 수강생들에겐 긍정적인 강의 평가만 받는 강사. 그렇게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나는 나의 밝음을 연소시켰고, 그렇게 타버린 재는 내 마음속에 깊숙이 조용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산책을 갔다 오는 길에 여느 때와 같이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감탄사 대신 “저 석양처럼 나도 같이 사라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사라지고 싶다는 갈망이 앞섰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었다. 밝음이라는 유전자를 지나치게 써버린 내게 우울이란 손님이 찾아왔음을. 흔히들 생각하는 우울의 얼굴은 늘 수척하고 눈물 젖은 모습일 거다. 그러나 그림자가 짙으면 빛이 밝듯, 세상에는 나처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매일 최선을 다해 밝은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내는 우울도 있다.


우울이란 손님을 맞이한 이후, 나는 여전히 일상에서 눈부신 연극을 진행 중이다. 나의 우울함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되지 않도록, 그리고 민폐 끼치는 걸 무엇보다 혐오하는 ‘책임감’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외출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나를 더 이상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 오늘 하루치 빛을 다 써버려 솜이불처럼 축 처진 나에게 따뜻하게 손을 얹어주며 위로해 주려 스스로 노력한다는 점.

사실 빛이 밝다는 건 그만큼 뜨겁게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그림자가 짙다는 이유만으로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그림자는 내가 타인을 사랑하느라 나를 너무 많이 태워버린, 아주 성실하고도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 같은 거니까.



「주피의 음악편지」

'커피소년 - 다리미'

에세이의 여운과 함께 들어보세요

(TBS 주용진 라디오PD와 매주 함께 연재중)


우리는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지우고 싶을 때요.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나만 슥삭 지워내는.


보통 궁지에 몰렸을 때. 어쩌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다시 말해 나를 소진했을 때겠죠. 앞의 얼굴을 속의 마음이 버텨주지 못하는. 배터리 잔량이 없으니 마음의 모터를 돌릴 수가 없죠. 그러면 우리는 일단 모터를 멈추고 마음의 배를 채워야죠. 졸아든, 구겨진 맘을 다시 펴는 게 우선일 겁니다.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전 노래로 살포시 응원하겠습니다. 스스로 그리고 서로 마음을 다려주기. 세상과 밀고 당기느라 애쓰는 서로를 응원하기. 우리 서로 이 정도는 해주면 어떨까요.


https://youtu.be/BUusuG4Yo60?si=LKFNiF-bNpOQZOS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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