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일
만우절인 4월 1일은 빌뉴스의 '우주피스(Užupis)' 구역이 하루 동안 독립공화국을 선포하는 만우절 축제날이다. '우주피스 공화국(Užupio Respublika)'은 일 년에 단 하루 존재하는 공화국이라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함께 대표적인 만우절 장난으로 알려져 꽤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우주피스라는 이름은 '강 너머'라는 뜻이다. 네리스 강의 작은 지류인 비넬레 강(개천?)이 말발굽 모양으로 휘돌아 흐르며 감싼 구역이다. 일곱 개의 작은 다리로 빌뉴스 구시가지와 연결되어 있다. 대체로 평평한 빌뉴스 시가지와 다르게 지형이 언덕이어서 오르막을 따라 낡은 건물들이 줄을 서 있다.
원래 빌뉴스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16세기 이래 빈민촌과 사창가가 있었고 소련 치하에서 거의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부터 젊은 예술가들이 저렴한 방세를 이유로 모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소위 '힙한' 지역이 되었다. 옛 공장 지대나 낡은 거리가 젊은 예술가들로 인해 되살아나는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다. 우주피스도 그런 경우로, 발트 지역 민속문화와 동유럽 집시 분위기가 합쳐진 토대 위에 최근의 다문화 경향과 창의적인 발상들이 어우러졌다. 아직도 폐허에 가까운 곳이 많지만 예쁜 공방이나 카페, 식당이 들어서서 이제 방세도 별로 저렴하지 않다고 한다. 만우절의 우주피스 공화국 축제 말고도 다양한 전시회나 콘서트가 열리는 문화 지구다. 빌뉴스 관광책자에도 '보헤미안 분위기의 예술가 구역'으로 나온다. 24시간짜리 공화국을 선포하는 장난은 1997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우주피스의 수호신인 중앙 광장(공터)의 높은 천사상은 2002년에 세운 것이다. 지역발전을 위한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전통'인 셈이다.
2018년에는 만우절이 일요일이 되면서 부활절과 정확히 겹쳤다. 거룩한 가족 명절이라 축제가 여의치 않았을 텐데 늦추위로 눈까지 내렸다. 일정이 어긋나서 가볼 수 없었는데 아마 분위기가 별로였을 듯하다. 2017년에 찍은 사진들을 보니 날씨가 좋은 편이어서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루짜리 공화국을 선포했다 해도 온 구역이 들썩들썩하는 축제는 절대 아니다. 그저 좀 더 많은 사람이 주말을 즐기는 정도다. 우주피스 공화국에 입국하는 의미로 여권 도장을 찍어준다는 게 제일 특이한 경험이다. 도장 찍어주는 학생들은 우주피스 구역 내 고등학교 동아리 학생들이었다. 진지하게 진짜 여권을 내밀었더니 당황하며 다른 종이에 찍어주겠다고 했다. 수첩에 받았는데 그럴듯한 출입국 도장이다. 대통령이나 외무장관, 주교 역할을 하고 있는 자유분방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맥주집 근처에서 술을 마시거나 대형 체스를 하며 즐기고 있었다. 그림을 그려주거나 페이스페인팅을 해주는 행사 부스도 몇몇 보였다. 정돈되기보다는 흐트러진 분위기를 지향하는 만큼 얼핏 망가진 듯한 장식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비넬레 천변의 맥주집이 가장 축제에 가까운 공간이고, 언덕을 따라 오르면 점점 조용하고 낡은 동네가 나온다. 유일한 랜드마크라고 할 만한 천사상이 있는 중앙에는 가설무대를 설치하고 민속의상과 집시풍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연극 공연을 하고 있었다. 건물은 하나같이 낡았지만 분위기를 깨지 않는 선에서 잘 고친 것도 많다. 작은 수공예 공방들이 눈에 띄었는데, 공방에서 직접 만든 작품은 예쁘고 개성적인 만큼 가격도 꽤 나갔다. 날이 날인 만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 잊을 만하면 동그란 바탕에 손바닥 모양을 그린 푸른색 우주피스 공화국 국기가 나타나서 여기가 자기들 영역임을 알렸다. 국기와 함께 별도의 국가도 있고 헌법도 있고, 나름대로 공화국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열심히 만들었다.
우주피스 공화국 국가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천사상 근처 벽에 여러 나라 언어로 헌법을 붙여놓아 대략의 취지를 짐작할 수 있다. 헌법 문구 대부분이 '모든 사람은~'으로 시작해서 개인의 권리를 써놓았다. 진지한 게 아니니 그저 웃기지만 달리 보면 생각할 구석이 많은 내용도 있다. 무려 38(+3) 개나 되는 조항 중에 "모든 사람은 따뜻한 물을 사용하고 겨울에 난방을 하고 타일 지붕을 가질 권리가 있다"라든지 "모든 사람은 폭력을 쓸 권리가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등의 조항은 와 닿는 면이 있다. 물론 정작 유명한 조항은 "모든 사람은 멍 때릴 권리가 있다", "모든 개는 개일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가끔 의무를 깜빡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일을 축하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아무 권리도 갖지 않을 권리가 있다" 같은 유머 넘치는 것들이다. 마지막 3개 조항은 싸우지 말고, 이기지 말고, 항복하지 말라는 것인데 일종의 구호다. 헌법을 여러 언어로 써서 나란히 붙여 놓았는데, 그 언어들을 봐도 우주피스의 분위기가 짐작된다. 당연히 리투아니아어, 영어와 함께 불어, 독어, '기본 빌뉴스 언어'인 러시아어, 폴란드어, 히브리어가 먼저 나온다. 하지만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언어가 많다. 쿠르드어, 우르두어, 프러시아어, 카탈루냐어, 에스페란토어 등 국가 경계와 상관없는 언어들을 우대하는 느낌이다. 중국어도 있지만 대만과 협력한 번체다. 게시판이 벽을 채워가는 중인데 2018년 만우절까지는 한글은 없었다. 주 폴란드 한국대사관에서 2018년 9월에 게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제는 한글 헌법도 같이 볼 수 있다.)
만우절 하루 동안의 공화국이라고 해서 대단히 특이한 구경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우려가 크다. 특별한 이벤트가 줄을 잇는 화려한 축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우절이 아닌 364일 중 하루에 간다면 볼거리가 전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좁은 언덕의 골목과 천변을 따라 가난하고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나름대로 질서를 가진 해방구를 이룬 모습은 과연 흥미롭다. 보헤미안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도 아리송하다. 우주피스 공화국에서 느낀 대로라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개인이 하고픈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 해학과 풍자로 무장한 채 즐겁게 사는 것이다. 가진 자들의 정치나 경제 논리는 비꼬아 웃어넘기고 관심을 꺼버린다. 티베트 문화센터가 우주피스 공화국에 상주하는 것도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곱 개의 작은 다리 중 몇 개 건너 보았는데 다리마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렸다. 꽤 큰 자물쇠가 많아서 난간이 위태로워 보이는 곳도 있다. 특히 비넬레 강과 같은 이름의 인어상이 내려다보이는 맥주집 앞의 다리는 자물쇠를 자주 비워줘야 할 듯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유일한 인어라는 비넬레는 모방인 듯 창작인 듯, 뭐든 만들어내는 우주피스의 입구를 지키고 있다. 다리 아래 겨냥하기 힘든 위치에 앉아있는 인어상에 동전을 안착시키면 우주피스에 영원히 남게 된다는 스토리도 있다. 유치한 줄 알면서도 그걸 시도해 보는 사람이 많아서 흩어진 동전이 상당하다. 사랑할 권리, 실수할 권리, 기억할 권리, 잊을 권리 등 지극히 개인적인 자유를 지킨다는 취지가 진부하면서도 새삼스러워서 매력으로 작용하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고 날씨도 우울한 리투아니아의 수도에 있는 이런 해방구는 이질적이면서도 참 잘 어울린다. 웃을 일이 많지 않은 일상 속에서 가끔 일탈을 꿈꾸며 웃어 보는 구실이 있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