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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18. 2018

융프라우, 6월의 눈보라와 비구름 체험

5일: 스위스 인터라켄, 융프라우요흐

아침부터 날씨는 왠지 불안했다. 어제도 간간히 비를 뿌리던 구름이 오늘은 더 많았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는 수준, 그 구름들이 십중팔구 높은 산봉우리들에 다 걸릴 것 같았다. 산 아래가 맑아도 산 위 날씨는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유럽의 지붕(Top of Europe)을 표방하는 해발 3500미터의 융프라우요흐 날씨는 그저 행운을 빌 뿐이었다. 오전에 빨리 올라가는 게 덜 붐빈다. 아침 7시부터 집을 나선 우리 세 가족은 7시 반에 이미 산악열차에 타고 있었다. 모든 관광객이 올라가는 코스답게 승객이 꽤 있었지만 이른 시간이라 줄은 서지 않고 곧장 올라갔다. 줄을 서지 않았어도 라우터브루넨에서 한 번,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한 번 더 갈아타는, 이동 시간만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기어이 중턱부터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꼭대기 날씨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 마음을 비웠다. 혹시나 해서 싸온 봄가을용 바람막이를 단단히 여미고, 한겨울 파카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한탄하며 빙하 동굴 속으로 진입했다. 

이른 시간 한산한 산악열차 / 융프라우 도착 전에 잠깐 보이는 빙하 경치

여행 다닐 때 날씨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막상 시계 제로의 융프라우요흐를 마주하니 좀 당황스러웠다. 어떤 날씨든지 다 좋은 경험이라고 위안을 해도, 전혀 보이는 것 없는 새하얀 전망은 아쉬울 따름이다. 융프라우 도착 조금 전, 산악열차 마지막 코스 중간 즈음에 잠깐 멈추고 동굴 창문으로 빙하를 구경하는 곳이 있다. 날씨가 맑으면 굳이 거기서 빙하를 구경할 필요가 없으니 그저 쉬는 곳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꼭대기가 순백의 눈구름 속일 때는 그 빙하가 마지막 경치가 되는 거였다. 융프라우요흐 전망대 로비부터 사방 모든 창문은 마치 하얀색 판을 끼워놓은 듯했다. 사람이 꽤 많이 모여있었음에도 실내가 너무 추웠다. 자세히 보니 엄청난 눈보라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받아온 할인쿠폰 덕분에 신라면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는데, 배고픔보다는 추위 때문에 몸을 녹이려고 먹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모두 우리처럼 아쉬움을 달래며 전망대 내부를 돌아다녔다. 전망대는 이런 날씨도 다 대비해놓았다는 듯 영상실, 모형관, 사진 전시, 얼음동굴 등 실내 볼거리가 많았다. 번호가 붙어서 코스별로 모두 돌게 되어있었고, 밖에 나가볼 수 있는 순서도 그 중간 즈음에 있다. 밖에 나가서 만년설을 밟으며 지척에 보이는 융프라우 꼭대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게 맑은 날의 모습일 터였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 공간은 어디가 구름이고 어디가 눈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나가보지 않을 수 없다. 각국 관광객들과 함께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갔다. 어디가 융프라우 꼭대기인지 알 수도 없는 공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복판에 꽂힌 스위스 국기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패기 있는 관광객들은 기를 쓰고 그 깃발을 부여잡고 사진을 찍었다.  

융프라우요흐 전망대 - 영상실, 얼음동굴, 시계 제로의 바깥구경

극한의 눈보라 체험으로 융프라우요흐 바깥구경을 하고, 경치는 영상과 사진으로 대체했다. 사실 17년 전 대학시절 배낭여행할 때 파란 하늘과 햇살에 반짝이는 만년설의 융프라우를 봤었다. 두 번째 방문에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본 셈인데, 내 탓은 아니지만 처음 오신 부모님께는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신라면도 챙겨 먹고, 비싼 기념엽서를 사서 한국에 남아있는 동생에게 부치고, 기념품도 사면서 추억거리를 챙겼다. 모든 것이 비싸고 고생스러웠지만, 두 번 오기 어렵다는 생각에 그 비용을 다 쓰면서 고생도 감안하게 하는 곳이 융프라우요흐였다. 

휘르스트의 스카이워크도 구름속의 산책

점심 즈음해서 관광객이 늘어나는 융프라우 전망대를 빠져나왔다. 내려오는 길은 다른 방면 산자락의 그린델발트 마을에서 갈아타는 코스를 잡았다. 라우터브루넨에서 뮈렌 마을로 가는 케이블카가 있던 것처럼, 그린델발트에서는 휘르스트라는 다른 산을 오르는 곤돌라가 있다. 혹시나 그쪽 산은 날씨가 괜찮지 않을까 싶어 곤돌라를 타보기로 했다. 2일간의 자유이용권을 톡톡히 활용하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곤돌라를 탈 때부터 비가 내렸다. 곤돌라만 30분 가까이 타는 내내 바람도 꽤 있었다. 결국 엄마는 멀미 증세를 보이셨다. 고생스럽게 도착한 휘르스트의 산장 주변에는 절벽을 따라 야심 차게 만든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절벽 풍경이 보였지만, 얼음 같은 비가 계속 내려서 감상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산장에서 몸을 녹이는 것으로 6월의 인터라켄 산 구경을 마무리했다. 


그린델발트로 내려오니 비는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빛도 비쳤다. 산봉우리들은 여전히 구름에 묻혀 있었지만, 산 아래는 다시 6월의 스위스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린델발트 마을에서는 암벽등반의 난코스로 유명하다는 아이거 북벽과 여러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숙박시설이 많은 리조트 마을이라, 인터라켄에서 여러 날 묵는 여행자라면 그린델발트에 숙소를 잡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묵은 에어비앤비 숙소는 인터라켄 중심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마텐 베이(Matten bei Interlaken) 동네에 있었다. 주거지역이었는데 남쪽으로 산들을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개인 하늘에서 긴 6월의 햇살이 기분 좋게 비쳤다. 뒷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자니 오전에 융프라우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떨었던 일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상에만 구름 모자를 쓴 먼 산들은 어느새 귀엽게 보였다. 


하루 만에 눈보라, 비바람, 다시 6월의 햇살까지 너무 많은 날씨를 체험했다. 두 번 올 줄 몰랐던 융프라우를 두 번째 올라갔으니, 세 번도 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맑은 융프라우요흐는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한다. 

그린델발트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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