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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25. 2018

마터호른, 구름 사이로 보인 뾰족함의 감동

6일: 스위스 체르마트, 고르너그라트 등반

아침 일찍 인터라켄을 빠져나와 스위스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마터호른으로 유명한 체르마트 마을을 내비게이션에 찍으니 고속도로보다는 대부분 국도를 지나는 루트다. 높은 산들 사이로 비교적 평평한 부분을 따라 도로가 나 있지만 고속도로에 비하면 꽤 구불구불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시간이 걸린다. 대신 산 경치와 마을을 좀 더 가까이 구경할 수 있었다. 사실 내비게이션에는 체르마트(Zermatt)가 아니라 그전에 있는 타쉬(Täsch) 마을 중앙의 주차장을 찍었다. 일반 자동차는 거기까지만 갈 수 있었다. 차 없는 마을을 표방한다는 체르마트 마을은 기차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고속도로용 비넷을 샀고 국도는 공짜였기에 스위스에서 통행료는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비상에는 다른 언급 없이, 중간 즈음 자동차를 통째 기차에 태워 통과시키는 'Car Train' 터널 구간이 나타났다. 통행료도 30유로가 넘는 꽤 비싼 금액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로취버그 터널(Lötschberg Tunnel)이라는, 주 경계를 이루는 높은 산맥을 관통하면서 소요시간을 2시간 가까이 줄였다는 15킬로미터 정도의 터널이었다. 기차 레일만 단선으로 깔렸고, 철제 화물칸처럼 엮어서 차를 일렬로 수십대씩 태우는 방식이었다. 터널에는 불빛조차 없고 좁고 시끄러워서 차 창문을 꼭꼭 닫고 암흑 상태로 20분 정도 실려갔다. 평소 30분 간격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도착해서 표를 사고 바로 탔으니 타이밍이 좋았고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예측 못하고 있다가 통행료를 뜯긴 기분이었다. 

구름만 없으면 마터호른이 잘 보인다는 고르너그라트 전망대

타쉬에 차를 세우고 마터호른이 잘 보인다는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로 올라가는 표를 샀다. 기차로 체르마트 마을에 들어가 고르너그라트행 산악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체르마트에서 올려다본 봉우리들 위로 꽤 구름이 많이 보여서 전망은 왠지 불안했다. 전날 융프라우에서 시계 제로를 경험했기에, 오늘만큼은 꼭 전망이 트이기를 기원하며 30분 정도 걸려 고르너그라트에 올랐다. 올라가면서 구름이 점점 많아지고 간간이 빗방물이 비치기 시작해서 마터호른 봉우리도 육안으로 보기는 포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였지만, 결국 고르너그라트 정상은 구름 모자를 이고 있었다. 다행히 시계 제로 까지는 아니었고, 눈높이 위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대신 눈 아래로는 빙하와 호수, 산줄기들이 인상적인 풍경을 보여주었다. 안타깝게도 뾰족 자태로 유명한 마터호른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고르너그라트 안내판에 표시된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구름만 두껍게 지나다녔다. 


빙하 구경도 하고 전망대 안에서 점심을 먹으며 혹 구름이 걷히지 않을까 기다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는 중턱 여러 곳에 정차하는데, 티켓만 있으면 얼마든지 내렸다가 다시 탈 수 있다. 두어 구간쯤 내려오자, 구름모자 구간을 벗어나면서 거짓말같이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고르너그라트 정상이 구름에 싸여 있었을 뿐, 조금 아래에서는 다른 봉우리들의 설경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두 번이나 중간 정차역에서 내려서 다음 기차가 오기까지 20여분 씩 구경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내렸을 때 화사한 햇빛과 함께 구름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낸 마터호른 봉우리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고르너그라트에서 내려오던 길 중간 정차역에서 만난 마터호른

스위스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융프라우지만, 뾰족하고 멋진 모양은 마터호른이 더 유명하다. 파라마운트 영화사 로고의 배경이 된 산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다른 산이라고 한다. 뾰족한 모양이 비슷하게 생겨서 그냥 우겨도 상관없을 것 같다. 산 위의 전망대와 달리 중간 정차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주변 경치를 독차지하듯 한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눈보라 때문에 경치는 실내 사진만 보아야 했던 전날 융프라우에서의 아쉬움을 말끔히 지울 때까지 실컷 쳐다보았다. 올해의 이상기후 때문인지 6월인데도 생각보다 야생화를 많이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빙하와 덜 녹은 눈 구경을 하면서 계절을 잊었다. 


마터호른은 암벽등반 전문가들 외에는 직접 오르는 경우는 많지 않고, 봉우리와 호수, 야생화를 구경하면서 하이킹하는 코스가 다양하다. 몇 년 전 '꽃보다 할배' TV 프로그램에 나온 후 한국 사람들이 부쩍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르너그라트의 산장이나 기차역에서도 신라면을 팔았다. 멋진 자태를 선사해준 마터호른 덕분에 이번에는 신라면의 위로가 필요 없었다. 풍족해진 마음으로 차 없는 마을 체르마트를 빠져나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음 행선지인 제네바는 스위스 서쪽에 눈썹 모양으로 드러누운 레만 호수의 서쪽 끝점이었다. 한 번에 가기에는 멀고 제네바 물가가 워낙 비싸서, 레만 호수 동쪽 끝인 몽트뢰(Montreux)의 에어비앤비를 숙소로 잡았다. 국도를 되짚어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몽트뢰까지만 가는 데도 2시간 넘게 걸렸다. 심지어 그 2시간 내내 억수 같은 비가 내려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 비 쏟아지기 전에 산 구경을 마친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순전히 마터호른 보겠다고 스위스 남쪽까지 열심히 내려왔던 것인데, 제대로 보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6월에 야생화가 많다던 체르마트 주변의 산은 아직은 눈밭이 대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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