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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02. 2019

제네바, 종교개혁의 자취 골라보기

7일: 스위스 제네바, 니옹, 로잔

에어비앤비를 구해서 이틀 밤을 머무른 몽트뢰는 스위스 서쪽 끝에 길게 누운 레만 호수의 동쪽 끝 지점이다. 아름다운 도시였고 에어비앤비 집주인이 친절하게 시내 관광지도와 교통카드까지 챙겨줬지만, 아쉽게도 몽트뢰를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거기 묵은 이틀 밤 사이의 하루 동안 제네바와 로잔을 다 보겠노라 욕심을 냈기 때문이다.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인 몽트뢰 경치에 눈도장만 찍고, 곧바로 레만 호수 북측에 면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 끝 제네바까지 달려갔다. 프랑스와의 국경이기도 한 레만 호수는 꽤 크고 길어서 고속도로 한 시간 반을 족히 달려야 했다. 제네바는 일 년 반쯤 전 겨울에 친구 방문 차 온 적이 있었던 덕에 나름대로 수월하게 길을 찾으며 관광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전날 퍼붓던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잔뜩 흐린 날씨였다. 맑았다면 눈이 부셨을 제네바 호숫가 풍경은 흐릿한 색깔로 별 느낌이 없었다. 다행이라 할지, 이 날 우리 가족의 관광 초점은 호수 경치가 아니라 종교개혁의 흔적을 찾아보는 거였다. 곧바로 언덕 위 대성당(이라고 하지만 개혁교회) 근처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종교개혁 박물관을 찾았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칼뱅의 이름이 가장 유명하지만, 박물관은 종교개혁 전후의 전반적인 설명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알차게 꾸며져 있어서 자세히 보려면 꽤 오래 걸린다. 박물관이 휴관하는 월요일을 피해서 일정을 짰을 정도로 아빠가 꼭 들르고 싶어 하셨던 곳이라 찬찬히 둘러보았다. 바로 옆 대성당에는 칼뱅이 앉던 소박한 의자가 남아 있다. 망설이다 올라간 첨탑 위 풍경은 다행히 구름 아래로 호수 주변이 꽤 잘 보였다. 하지만 6월에 어울리지 않는 찬바람 때문에 가을점퍼를 꼭꼭 여며야 했다. 

제네바 종교개혁 박물관과 대성당. 첨탑 위는 바람이 심했다. 대성당 지하는 로마 시기 유적 발굴이 계속 진행중이다.

제네바는 스위스에서도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다. 대성당 옆 조그만 크레페 가게에서 아침식사 같은 점심을 먹었는데 웬만한 도시에서 든든한 만찬을 먹을 만한 가격이다. 허기만 모면하고 호수 반대쪽으로 언덕을 내려와, 언덕 아래 긴 벽면에 만들어놓은 종교개혁 기념벽을 찾았다. 겨울에 왔을 때 혼자 두리번거렸던 보람이 있어서, 이번에는 부모님 모시고 최단거리로 바로 찾아갈 수 있었다. 제네바 대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종교개혁 기념벽은 가운데 칼뱅을 포함한 유명한 네 명의 제네바 종교개혁가들이 커다랗게 조각되어 있다. 좌우로는 다른 유명한 개혁가나 후원자들 조각과 이름들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너무 길어서 사진을 잘 찍기는 불가능했다. 


대성당이 있는 언덕 아래 만들어 놓은 종교개혁 기념 벽 앞은 공원이고, 관광열차도 다닌다.
공동묘지 한 켠의 칼뱅 묘. 원래는 위 머리맡의 작은 돌이 전부였다 한다.

오후 나절에는 로잔으로 옮기면서 가는 길에 호수 주변에서 피크닉이라도 할까 했었다. 하지만 칼뱅의 묘지를 보자는 아빠의 강력한 바람에 뒤로 밀렸다. 종교개혁 테마로 굳어지면서 흐린 날씨의 호숫가 경치나 구시가지 분위기는 눈길을 끌지 못했다. 종교개혁 박물관 직원에게 칼뱅의 묘지 위치를 물어보았을 때는 순진하게도 전승대로 '위치는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청빈했기로 유명한 칼뱅답게 무덤을 표시 나지 않게 하라고 유언했고, 그래서 모른다는 거였다. 스위스 사람은 몰라도 한국 사람은 안다. 한국 블로그나 성지순례 후기의 정보력이 우월했다. 기어이 구시가를 벗어나 시립 공동묘지 깊숙이 있는 칼뱅의 묘지까지 찾아갔다. 유언처럼 표시가 없어 못 찾을까 걱정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종종 있어서인지 공동묘지 안내판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원래 머리맡의 작은 목침 같은 돌 하나였던 모양인데, 지금은 직사각형으로 울타리도 쳐 있고 발치에 더 큰 표지석도 놓였다. 그래도 여전히 다른 무덤에 비해 심히 소박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칼뱅 성묘까지 마치고 로잔을 향해 가면서는 호숫가로 가는 지방도로를 택했다. 종교개혁 탐방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맘 편하게 경치를 즐기며 갈 셈이었다. 호숫가로 마을이 이어지던 중, 니옹(Nyon)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서 잠시 차를 세웠다. 작지만 백설공주 성 같은 샤또와 잘 정리한 정원을 가진 예쁜 곳이었다. 호숫가의 마을들 중에서는 큰 편이다. 작고 네모난 요새풍 샤또의 테라스에서 보이는 호수 전망이 그만이었다. 호수 건너편은 프랑스다. 날씨가 맑았다면 건너편 프랑스가 더 잘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구름이 꼈을지언정 안개는 없어서 나름대로 또렷하고 차분한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제네바에서 로잔 가던 길 중간에 만난 니옹(Nyon)의 샤또


그렇게 오후의 경치를 좀 즐기느라 정작 로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6월의 6시는 대낮 같지만 스위스의 퇴근시간이 늦춰지지는 않는다. 로잔 성당 아래 광장 주차장으로 직행해서 차를 세우고 곧바로 성당으로 올라갔다. 이미 내부 공개 시간은 끝났을 거라 포기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구경하고 경치나 보다가 내려오려 했다. 그런데 5시면 닫았을 줄 알았던 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중요한 손님의 용무가 덜 끝났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들어가서 눈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우리 가족의 당일치기 종교개혁 투어는 로잔 대성당(개혁교회)까지 방문하는 것으로 초과 달성되었다. 


규모는 제네바 대성당보다 로잔의 대성당이 더 크다. 겨울에 혼자 왔을 때는 하루 만에 두 성당 첨탑을 다 올라갔었지만, 부모님과의 여행에서 첨탑은 하루에 하나면 족했다. 평평한 지대가 많은 제네바와 달리 호수 바로 앞부터 바로 언덕이 시작되는 로잔은 시가지도 대단히 경사가 지고 언덕이 심하다. 이미 오전부터 칼뱅의 흔적을 짚어 다니느라 움직임이 많았던지라, 로잔 구시가는 성당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관광을 마쳤다. 사실 로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있어서 올림픽의 도시라고 선전을 한다. 우리나라에도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거치며 많이 알려졌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 가족에게 로잔은 종교개혁 테마 여행의 연장선이었다. 1974년에 있었던 기독교 복음주의 선교 세계대회인 '로잔 대회'와 '로잔 운동',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을 연상해낸 아빠의 기억과 함께, 제네바와 로잔 여행은 성지순례 비슷한 느낌으로 마무리되었다. 


저녁 나절 로잔 대성당 앞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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