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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05. 2019

베른의 산 곰, 루체른의 죽은 사자

8일: 스위스 베른, 루체른 호수 주변

스위스의 수도는 베른이다. 중세도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지만, 산이나 호수 경치가 유명한 스위스에서 베른은 관광객이 주목하는 도시는 아니다. 취리히나 제네바보다 덜 유명해서 수도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우리 여행에서도 베른은 스위스를 가로지르는 길 중간에 걸리는 도시일 뿐이었다. 이왕 수도라 하니 한 번 들어가 보자는 정도였다. 아침에는 숙소였던 몽트뢰의 호숫가를 잠시 산책하고, 오후에는 루체른의 호숫가에서 여유를 즐기기로 한 일정 사이에 베른이 있었다. 관광지로서의 기대가 별로 없었기에 두어 시간이면 점심까지 먹고 여유롭게 떠나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매우 틀린 생각이었다. 


흰 구름이 드문드문하지만 화창해져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날이었다. 몽트뢰의 레만 호수 주변을 떠나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베른 구시가에 도착했다. 검색에 나온 장소 중 전망이 보인다는 장미정원에 올라설 때만 해도 별 기대가 없었다. 비탈길을 꽤 올라가서 만난 장미정원은 계절이 잘 맞지 않았는지 큰 감흥이 없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아름다운 베르네 산골'의 '알핀 로제스'를 기대했으나, 장미보다는 시민들의 휴식처라 할 만한 공원이었다. 장미는 별로였지만 반전은 있었다. 정원 테라스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베른 구시가를 본 순간 여기가 필수 코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끼고도는 가운데에 언덕으로 올라앉은 베른 구시가지는 잘 가꾼 중세풍 도시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우뚝 솟아오른 뮌스터(교회당) 첨탑 아래로 고르게 자리 잡은 벽돌색 삼각 지붕들과 굴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몇몇 건물들의 좀 작은 첨탑이나 종탑, 강에 놓인 다리까지 강과 주변의 푸른 산 색깔과 어울려서 "이게 바로 스위스 도시"라고 뽐내는 것 같았다. 

장미정원에서 내려다본 베른 구시가지
베른의 살아있는 곰

도시 풍경이 좋아서 시들어가는 장미마저 예뻐 보인 장미정원 출구에서는 베른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동상을 만나기도 했다. 언덕을 내려와 구시가로 진입하는 다리를 건너는 지점에서 곰을 만났다.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무슨 구경거리인가 했는데, 움푹 파인 우리에 진짜 갈색곰이 살고 있었다. 곰이 상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시가 진입로 앞에 곰을 기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곰 우리 연결통로가 강 쪽으로 나있었다. 다리 아래로 강 한쪽 비탈 거의 전부가 곰들의 운동장이었다. 좁은 공간에 가둬두고 눈요기로 삼는다기보다는 넓은 곰의 영역 중 한 곳을 사람들이 보기 편한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거였다. 마침 고맙게도 그 공간에서 놀아준 곰이 있어서 알아봤지, 다른 구역에서만 놀고 있었다면 곰이 있는 줄도 몰랐을 터다. 


베른 구시가는 직선으로 뚫린 중앙로를 따라 회랑처럼 아케이드가 조성되어 있다. 중간중간 중세 식수대였을 분수대가 있고 거기도 곰 형상이 있다. 수도답게 중앙로 곳곳에 각국 대사관 깃발이 보이고, 스위스 답게 비싼 명품 가게도 많이 있다. 중세 도시가 그리 깔끔하지 못해야 정상인데, 스위스의 이 중세 도시는 반듯하고 깨끗한 느낌이다. 중앙로를 가운데 두고 다른 길들도 평행으로 나 있고 골목으로 연결되어, 구시가 답지 않게 바둑판 계획도시 같다. 중간 즈음에 뮌스터 교회당이 있는 광장으로 빠지는 골목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위스의 종교 건물 중 가장 크다는 베른의 뮌스터도 원래 가톨릭 성당이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개혁교회로 바뀌었다. 종교개혁 시기 성상파괴 운동에서 유일하게 성당 정문 위 최후의 만찬 장식이 살아남았다는 설명이 있었다. 바젤이나 제네바, 로잔 등 스위스 내 큰 교회당들의 내부와 외부가 유난히 심플하고 깔끔했던 이유도 성상 파괴 운동과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베른 구시가지 중앙로 성문 근처의 곰 분수대

생각보다 구경거리도 많고 인상적이어서 베른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졌다. 여유 있는 점심식사가 불가능해서 아케이드 끝 지점의 성문 옆 맥도널드로 해결했다. 맥도널드 가격이 만만찮았지만 다행히 부모님도 잘 드셨다. 오랜만의 맥도널드는 고향의 맛으로 다가온다. 점심 후 2시간 가까이 부지런히 달려 루체른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반, 호숫가는 관광객이 넘쳐났다. 요 며칠 보기 어려웠던 화사한 햇살이 비친 날이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호수로 유명한 루체른에서 오래간만에 인기 관광지다운 단체 관광팀도 여럿 보았다. 뱃멀미 우려 때문에 우리 가족 여행에는 유람선이나 보트 탑승이 없다. 루체른에서의 오후 계획은 원래 여유로운 호숫가 산책과 우아한 휴식이었다. 예상과 달리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베른에서보다도 더 전투적으로 다니게 되었다. 


그림이 그려진 목조 다리로 유명한 카펠교를 두어 번 지나며 구경을 하고 '빈사의 사자상'을 보러 갔다. 17년 전 배낭여행 때 루체른에서 한 나절 보낸 적이 있다. 그때 카펠교보다 기억에 남았던 곳이 그 돌 절벽의 죽어가는 사자상이었다. 당시에는 호젓한 마을길을 찾아가다가 작은 공원 작은 연못 건너편 벽에 나타났었다. 기대에 비해 소박한 사자 조각에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기억이 조작된 것일까? 오랜만에 사자상을 찾아가는 길은 온통 번화한 쇼핑 거리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마주한 바위 사자는 희한하게도 예전보다 부쩍 커진 듯했고 조각도 웅장해 보였다. 프랑스혁명 때 튈르리 궁에서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전멸한 스위스 용병들을 기념한다는 스토리로 유명한 이 사자상은 이미 1800년대 초반에 완성된 작품이다. 200년이 다 되었는데도 얼마 전에 새긴 듯 깨끗하다. 옆구리에 창을 맞고 죽어가는 사자 표정이나 자세도 실감 나서 오래된 조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사자상이 왜 꼭 루체른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온한 호수 경치만 보다가 스위스의 역사를 조금 엿볼 수 있는 멋진 인공 창작물을 만나는 것도 괜찮은 코스다. 

루체른은 카펠교, 빈사의 사자상과 함께 호수 주변이 인기 관광지다.

지금은 더없이 부유하고 살기 좋아 보이지만, 사자상이 되새기는 역사 속 스위스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죽어가는 용맹한 사자로 표현해서 용병들의 용기와 충성심을 부각했다. 그러나 명백한 죽음 앞에서도 항복이라는 선택지를 갖지 못한 계약관계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유럽 강대국 사이에서 경제적인 목적으로 용병을 하며 생존했던 가난한 약소국 시절을 기억하는 기념물이다. 사자상이 예상외로 멋져 보여서 한참 앉아 있다가, 다시 호숫가로 나와서 또 산책하고 카페에 앉는 것으로 루체른에서의 오후 나절을 마무리했다. 깨끗한 죽은 사자에 비해 호숫가에 살아 돌아다니는 백조들은 지저분해 보였다. 호젓했던 사자상 공원에 비해 호수 주변 벤치와 부두가 번잡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기 관광지가 된 루체른은 숙박도 꽤 비싸서, 이날 숙소는 취리히 근교까지 올라가 바덴에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생각보다 볼거리도 많고 인상적이었던 베른, 생각보다 번잡했던 루체른 호수, 생각보다 훨씬 멋진 사자상까지, 계획했던 모든 장소가 예상과 다르게 다가온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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