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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06. 2019

수도사의 책, 하이디의 마을, 유리의 성 공국

9일: 스위스 장크트갈렌, 아펜첼, 리히텐슈타인 파두츠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날,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동쪽 지방의 볼거리를 검색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까지 갈 계획이었기에 여러 곳을 들를 수는 없어서 취사선택을 해야 했다. 출발 전에 부모님께 '보고 싶은 것들을 검색해 볼 것'을 주문했으나 별로 말씀하신 게 없었다. 그중 취리히 동쪽, 국경 근처 장크트갈렌 도서관을 낙점하셨다. 취리히를 들렀다 갈까 잠시 망설였으나, 부모님은 몇 년 전에 취리히를 가보신 적이 있었다. 나는 취리히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큰 도시는 기회가 더 있으리라며 다음으로 미루고 바로 장크트갈렌을 향해 달렸다.


장크트갈렌(Sankt Gallen)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종교개혁 전, 18세기까지는 수도원의 위세가 대단했던 곳이라 한다. 생 갈렌, 상트 갈렌 등 여러 가지로 부르지만 독일어 사용 지역이니 장크트갈렌이라고 하기로 했다. 지금도 독일어권이지만 중세에는 수백 년간 독일 영역이었다. 수도원이 고급 교육기관이었던 만큼 학문과 예술로 명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상업화된 대학이 유명하고, 수도원은 없고 도서관만 보존하면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은 깔끔하고 중세풍 장식과 꽃장식, 주위 산세가 잘 어우러져서 정말 예뻤다. 도서관이 속한 부지 내 교회당은 도시 규모에 비해 크고 화려했다. 스위스에서 과거 성당이었던 지금의 개혁교회들은 대부분 심플하고 장식성이 덜하다. 이 교회당은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흰 벽감 장식이 상당히 화려한 편이었다.

장크트갈렌의 교회당과 그 유명한 도서관. 도서관은 촬영 불가라 포토존의 사진을 사진찍었다.

막상 그 귀하신 도서관은 기대에 비해 실망이었다. 천 년 된 장서도 있고 서가와 바닥이 오래되어 고풍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 보존을 하느라 내부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검색도 철저하며, 덧신을 신고 들어가야 한다. 오랜 세월 보존한 것이 존경스럽기도 하나, 너무나 소박한 규모에 이게 다야? 는 말이 튀어나왔다. 유리판 안에 소중하게 들어있는 수백 년 된 귀한 고서 몇 권은 글씨와 그림체가 왠지 낯이 익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Book of Kells"가 전시되어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구 도서관을 감동하면서 봤는데, 고서 분위기가 흡사했다. 아일랜드의 고서들이 국가급 공식 소장판 느낌이고 이곳 고서들은 개인 소장용 같다는 차이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7세기 초에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와서 수도원과 도시를 세웠다는 거였다. 도시 이름이 된 갈루스(Gallus) 수도사가 아일랜드에서 왔고, 책도 아일랜드에서 공수했다고 한다. 당시 스위스는 선교를 가서 개척을 해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을 것이다. 그 아일랜드 필사본들이 고서가 되고 보물이 된 도서관이다. 어쨌거나 그 중세에 이런 시골에 이 정도 도서관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대단하다. 도시를 일으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든 당시 수도원의 역량을 도서관이 남아서 보여주고 있었다. 수도원이 없어진 지 2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으니 책의 힘도 위대하다.

 

장크트갈렌에서 바로 오스트리아를 향해 넘어갈 수도 있지만 왠지 아쉬웠다. 자동차 여행이 아니면 평생 가볼 일이 없을 것 같은 리히텐슈타인 공국에 발을 디뎌보고 싶었다. 결국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파두츠를 들르기로 했다. 그래서 남쪽으로 빙 돌아갔다 올라와야 했는데, 중간 즈음에 아펜첼 마을이 있었다. 아펜첼(Appenzell) 마을을 처음 검색했을 때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언급한 포스팅이 있어서, 나는 여기가 하이디 마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공식으로 하이디 마을을 표방하는 곳은 마이엔펠트(Meienfeld)라는 곳으로, 리히텐슈타인보다 더 남쪽의 다른 산골 동네였다. 거기는 하이디 월드라고 이름을 붙이고 아예 관광지로 꾸민 것 같았다. 사실 하이디가 실존 인물도 아니고, 소설 속 배경이 된 곳이라 해도 꼭 특정 지역을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스위스 동부 지역이라면 다 비슷한 산세다. 동화 속 하이디는 외딴 산속 오두막 소녀였으니 어느 산이나 비슷할 것이다. 아펜첼 마을을 드나드는 길은 정말 좁은 지방도로였다. 그래서인지 이어지는 산들과 마을 경치가 정말 예뻐서, 어디서나 하이디가 뛰어놀았다고 하면 믿을 것 같았다.

아펜첼 마을과 주변의 산 경치

아펜첼은 소 치는 목동 마을 콘셉트로 건물을 예쁘게 꾸몄고 부티크와 숍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근처 산으로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점심 먹을 겸 들러서 하이디 느낌을 추억하며 돌아다녔다. 사실 하이디는 이런 마을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스위스 느낌'을 각양각색으로 발산하고 있는 집들은 소녀 감성 자극에 안성맞춤이었다. 엄마와 내가 기억하는 하이디는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나오는 귀여운 이미지다.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영화가 주입한 유럽 시골 마을에 대한 환상까지 겹쳐 하이디, 클라라 느낌 충만한 점심 나절을 보냈다. 아펜첼 마을을 나와서 리히텐슈타인으로 내려가는 중에도 예쁜 산들이 이어진 배경이 나오면 한쪽에 차 세우고 모녀가 사진 찍기에 바빴다.

 

아펜첼 근처 동부 스위스 지방도로에서 하이디 느낌에 젖어있다가 다시 고속도로를 만나 리히텐슈타인에 진입했다.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리히텐슈타인은 '공국'이라고 번역하는데 공작 일가 소유의 영지 정도로, 사실상 스위스의 일부나 다름없다. 어린 시절 소녀 감성의 일부를 지배했던 일본 순정만화책 '유리의 성'에 리히텐슈타인의 '황태자'가 조연급 남자 캐릭터 중 하나로 나왔었다. 실제 황태자라는 호칭은 적절치 않고 '공자' 정도일 것 같은데, 그때는 리히텐슈타인이 진짜로 존재하는 나라인 줄도 몰랐었다. 수도 파두츠에는 공작 일가의 성이 있다. 실제 살고 있어서 개방되어 있지 않아 절벽 위의 성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절벽 위 각진 형상의 성은 어린 시절 순정만화 추억에 부응하기에는 별로 낭만적이지 않았다. 파두츠라는 도시도 너무 직선적이고 현대적인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리의 숍들도 전부 비싸 보였고, 공식 기념품점 한 곳을 빼고는 관광객의 눈길을 끌 만한 곳은 없었다.  

리히텐슈타인 수도 파두츠, 절벽 위 공작 성과 거리 분위기

리히텐슈타인 파두츠는 발도장을 찍는 의미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길을 되돌아 올라와 가느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는 저녁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굳이 다녀올 만큼 볼거리가 없었기에 그냥 인스브루크로 갔더라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번 가 본 사람이니 할 수 있는 것이다. 작고 외진 리히텐슈타인은 이렇게 일부러 가지 않으면 평생 밟아볼 일이 없다. 굳이 다시 갈 일 없겠다는 감상도 가 봐서 얻은 수확이다. 티롤의 주도로서 관광객들의 칭찬 일색인 인스브루크를 더 일찍 가서 볼 수 있었을 오후 나절을 놓쳤지만, 하이디와 유리의 성 같은 소녀 시절 감성을 따라가 본 외딴곳 여행도 뿌듯한 성취감을 주었다. 아펜첼이나 파두츠가 실제로 하이디나 유리의 성과 아무 관련이 없어도, 내 여행은 내 기분이 중요하니 그걸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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