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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10. 2019

블레드, 호수라고 다 같은 호수가 아니다

12일: 슬로베니아 블레드, 보힌 호수, 류블랴나

슬로베니아가 일정에 들어온 이유는 오스트리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7년 전 배낭여행하면서 부다페스트에서 베네치아까지 가는 야간열차를 타고 기차 탄 채 지나간 적이 있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깨워서 불법 경유라며 벌금으로 돈을 뜯어갔던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나라다. 당시 유럽연합 가입국이 아니었고 자유통행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명분이었다. 지나가는 기차를 세우고 승객을 깨워서 소중한 현금을 받아가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 나라도 이제 유럽연합 가입국이고 솅겐 조약국이라 자동차로 아무 제한 없이 드나든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개화되어 보였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김에 수도 류블랴나에서 하루 묵어 가고자 검색해보니 유명한 관광지들이 꽤 많이 보였다. TV 프로그램도 많이 다녀간 모양이다. 한국 사람들이 올린 정보도 수두룩했다. 북쪽 지방에는 일종의 기본 코스처럼 블레드 호수, 보힌 호수 추천이 많고, 남쪽으로는 포스토이나 동굴 포스팅이 많았다. 어느새 슬로베니아도 관광대국을 꿈꾸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모두 고속도로 통행용 비넷을 사야 한다. 하루 이틀 일정으로 통과하더라도 최소 열흘 또는 2주짜리 비넷이다. 억울했지만 차 창에 비넷이 붙어가는 게 일종의 여행 인증 같기도 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세 시간 가까이 달려 블레드 성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블레드 성 뒤쪽으로 가파른 언덕길이 있다. 세울 곳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일단 차로 올라갔는데, 현금 유료였지만 주차 공간이 있었다. 큰 버스들은 세워둘 수 없는 작은 주차장이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바로 성 안으로 들어가 점심부터 먹었다. 조금 비싸 보이기는 했지만 경치가 잘 보이는 테라스의 레스토랑 야외석으로 자리를 잡고 천천히 먹으면서 경치를 감상했다. 지나가는 한국 관광객이 많았는데 레스토랑에서 점심 먹을 정도로 여유를 부리는 한국 사람은 우리 가족뿐인 것 같았다. 시간이 자유로운 자동차 여행이니 부릴 수 있는 여유다. 


블레드, 블레드 성, 블레드 호수를 극찬한 후기들을 보면서 뭐 그리 유난하랴 생각했었다. 직접 와보니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맑은 하늘 아래 잔잔하게 푸른색을 뽐내고 있는 블레드의 호수 경치는 과연 감탄스러웠다. 절벽 위의 성에서 균일한 푸른빛의 호수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석회질이 많은 물이라 새파랗지는 않고 약간 흐린 푸른색인데 색다르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호수 한편에 조그만 성채가 있는 작은 섬이 포인트를 주고, 주위 산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햇빛을 가득 받은 블레드 성 테라스 이쪽저쪽 사진을 찍으며 한참 머물렀다. 요새화 된 성 곳곳은 민속촌처럼 전시실이나 박물관, 가게로 꾸며져 있다. 프레스코화로 채워진 작은 교회도 딸려있다. 성채와 성곽에 올라가 볼 수 있어서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가 보였다. 성을 내려와 호숫가에서 절벽 위의 성을 올려다보는 경치는 또 다른 분위기다. 호수 주변은 공원화되어 걷거나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피크닉을 하면서 호수에 그냥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이 정도 관광지의 유명한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데 아무 제약이 없는 것도 조금 신기했다.   

블레드 성에서 내려다본 호수, 호숫가에서 올려다본 블레드 성

호수 경치가 블레드보다 더 좋다는 보힌 호수는 좀 더 산속으로 들어가 있다. 아직 유원지 느낌은 아니고 훨씬 조용했다. 주위 산들로 하이킹 코스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호수 주변의 일부만 산책하고 돌아 나왔는데, 아무데서나 호수로 뛰어드는 아이들과 간혹 보이는 작은 보트가 편안하기 그지없는 장면을 연출했다. 절벽이나 성 같은 드라마틱한 구도는 없다. 잔잔하고 넓고 맑은 호수 빛깔이 바람과 햇빛에 따라 변하는 청량한 풍경이다. 날씨가 더웠다면 우리 가족도 호수에 들어갔을지 모르겠다. 여름다운 햇살이 비치기는 했지만 아직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늦봄 정도 되는, 걷기 좋은 날씨에 눈만 부셨다. 호수에서 수영하는 걸 막는 사람이 없어서 수영은 가능하다. 맘대로 할 수 있는 대신 물놀이 시설이나 안전설비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야말로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해결이다.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지만 시설이 완비되는 수준은 아직이다. 해수욕장의 탈의실, 샤워실 같은 시설이 없는 대신에 한적하고 자연 그대로인 풍경이 있었다. 몇 년 후에 오면 확 다르게 개발되어 있을 게 분명하다. 호젓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발전은 아쉬운 일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보힌 호수

보힌 호수를 떠나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호수 경치 감상하느라 시간이 꽤 늦어서, 류블랴나 시내 숙소에 짐을 풀고 구시가에 나갔을 때는 이미 저녁 8시였다. 슬로베니아를 찾는 모든 여행객이 들르는 수도 답게 구시가는 잘 정돈되고 꾸민 티가 났다. 한 템포 느린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좋다는 감상을 본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은 내일 아침이면 바로 남쪽으로 출발해야 했기에 류블랴나에서 느린 여행을 할 시간은 없었다. 저녁 한 끼 먹을 시간이 고작이었다. 겨우 세 개의 다리(Tromostovje)가 있는 구시가 중앙 광장을 둘러본 정도다. 분홍색이라 인상적인 프란치스코회 성당을 뒤로하고 세 개의 다리를 건너면 옛 중앙로였을 길이 시청사까지 뻗어있다. 그 위로 우뚝 솟은 언덕 위에 류블랴나 성이 있다. 고풍스러운 성채가 남아있어 아래쪽 구시가의 비교적 근대적인 건물들과 대비되어 보였다.


언덕 위 성에도 레스토랑이 있다고 들었지만, 오늘 운동량이 충분했던 우리 가족은 전망 욕심을 접고 아래 마을에서 먹거리를 찾았다. 성이 있는 언덕을 감싸듯 흐르는 류블랴니차 강을 따라 카페와 식당이 연이어 있다. 그중 한 식당을 찾아 늦은 저녁을 천천히 즐겼다. 여기도 월드컵 열기가 있어서 류블랴나 거리의 저녁은 조용할 수 없었다. 웬만한 카페나 식당은 다 축구 중계를 틀었고 사람들이 모였다. 스포츠로 하나가 된다는 올림픽의 선전 문구는 꼭 선전만은 아니다. 세계인이 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월드컵을 즐기는 자세는 다들 비슷하다. 매체가 발달되어서 즐기는 방법을 서로 보고 배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 또한 스포츠로 하나 되는 현상의 일종일 수도 있다. 한 나절이라도 더 시간이 있었다면 류블랴나 구시가를 제대로 한 바퀴 돌았겠지만 그 욕심을 접고 쉬었다. 제한된 시간과 체력을 인정하고 취사선택하는 용기(?)도 필요한 게 여행이다. 

류블랴나 구시가지 중앙 광장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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