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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24. 2019

비가 와도 예쁜 핫플레이스 체스키 크룸로프

22일: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프라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독일 베를린까지 올라가는 길 중간에 하루 잘 곳을 정해야 했다. 체코를 통과만 하기는 살짝 아쉬워서 프라하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저녁 먹고 야경이나 보자는 거였다. 프라하는 온 가족이 한 번 이상 가봤기에 관광은 안 하기로 했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도시고, 갈 때마다 새로울 게 분명한 도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경유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체코에서는 오직 프라하밖에 아는 곳이 없었다. 비엔나를 출발해 프라하까지 직행하려다, 중간에 어디 들를 곳 없나 잠깐 검색을 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몇 년 전부터 체스키 크룸로프가 각광을 받고 있었다. 체코 남서부 국경에 가까운 후미진 도시였다. TV 프로그램이 다녀간 것일까? 2014년 이후로 한국 사람들도 많이 찾는 모양이었다. 한글 후기도 많았고 대부분 평가가 좋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주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방도로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가볼 만한 거리에 있었다.


문제는 구름이 꽉 낀 하늘과 드문드문 내리는 비다. 체스키 크룸로프가 동화 속 마을처럼 예쁘다고 해도 우중충한 하늘색과 오락가락하는 비가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아님에 감사하기로 했다. 우산과 잠바를 챙겨 길을 나섰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지만, 이곳은 지방도로를 한참 타야 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별생각 없이 달렸으나 체코 지방도로에 접어들면서 확 달라졌다. 포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좁은 길이 많아 내비게이션을 의심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국도도 있는데, 들어갈 때는 진짜 시골길을 탔던 것 같다. 밋밋한 체코 시골 풍경을 한참 지나고, 숲 속 오솔길을 탐험하듯 구비구비 달렸다. 체스키 성 주차장은 성 뒤편, 마치 절벽이 막아 선 듯한 공원에 있다.

비가 와서 관광객이 덜한 편이었을 듯한 체스키 크룸로프 구시가 입구와 성문 앞
구시가에는 빗속에서도 예쁜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중충한 대신 한가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관광객 단체 팀이 색색가지 우산을 쓰고 우르르 지나갔다. 외진 곳이지만 핫플레이스였던 것이다. 비옷과 우산을 장착한 각양각색의 관광객들이 좁은 골목을 누볐다. 좀 예쁘다 싶은 카페들은 자리가 없었다. 성채가 올려다보이는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부터 먹었다. 절벽 위의 성을 구경하려면 등산을 해야 될 것 같아서 밥을 든든히 먹었다. 생각보다 벅찬 오르막은 아니다. 성채 자체가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고 있어서 그리 가파르지 않았다. 솟아오른 절벽처럼 보이나 사실 블타바 강이 깎아내려가 생긴 언덕 위에 성채를 이어서 높이 쌓아 절벽처럼 느껴지는 거였다. 도시 규모에 비해 이상할 만큼 큰 성이 언덕을 꽉 메우고 있다. 체코에서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계곡 위는 성, 아래는 그 성 면적보다 작아 보이는 구시가 마을이다. 성문 앞 해자에 해당하는 푹 꺼진 공간에 곰을 키운다고 하는데 날씨 때문인지 곰은 보이지 않았다. 성벽이 따로 없이 성채의 바깥 면이 곧 성벽이다. 안쪽으로 중정처럼 통로와 작은 광장들이 이어져 있다. 정원은 골짜기 건너 다른 언덕 위에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그 정원 입구의 테라스에서 성채와 마을을 한눈에 보는 경치가 그만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과 매우 가깝다. 체코보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최종적으로 체코 영토로 확정된 것은 2차 대전 후의 일이다. 13세기부터 중세 영주의 성이 있었는데, 대부분 기간 동안 '로젠버그(Rosenberg)'라는 독일식 성을 쓰는 가문이 소유했다. 17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가문 귀족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면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스타일로 성이 점점 확장되었다고 한다. 주민도 독일계가 다수였고 체코어보다 독일어를 쓰는 인구가 항상 더 많았다. 1차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가졌지만 다시 2차 대전 때 독일 나치가 차지했고, 전쟁 후 다시 체코로 편입된다. 그때 독일어를 쓰는 인구는 독일로 추방했단다. 공산정권 시절에는 거의 방치되었다. 1990년대 이후로 관광지로 복구하고 개발하면서 유네스코 유산이 되었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탑과 성채 박물관, 성채 안쪽의 중정

체스키 성 내부를 자세히 보는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바로크식 극장이 유명하다는데 개방 시기가 매우 제한적이다. 내부의 방들은 중세나 근대 영주와 귀족들이 쓰던 때처럼 복원했다고 한다. 성 내부 관람 대신 성채 입구 쪽에 있는 탑과 거기 딸린 작은 박물관을 들어가 봤다. 성채 입구에 있는 탑은 뾰족한 청동 지붕을 얹은 원기둥인데 아이스크림처럼 예쁜 색깔로 시그니처 역할을 한다. 그 탑과 최근에 만든 '성채 박물관'은 상시 개방으로 표를 팔고 있다. 체스키 성의 소유주들이 누구였고 어떻게 살았는지 소개하는 박물관이다. 아직은 영어 안내도 자세하지 않고 한국어 안내는 기대할 수 없었다. 성 내 채플에 있었다는 어떤 성인의 해골이 들어있는 제단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성 안쪽 길을 따라 정원 입구까지 다녀오며 산책하듯 둘러보았다. 구획마다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이 나온다. 아치로 된 터널 같은 문을 통과하면 또 다른 중정이 나온다. 3~4층 정도 되는 성 벽면은 온통 그림이다. 평평한 벽인데 마치 고풍스러운 자재를 써서 조각과 무늬를 넣은 것처럼 그렸다. 잘 깎은 노란 돌로 쌓고 그 중간중간 다양한 재질과 모양으로 꾸민 것 같지만 다 그림이다. 모서리 장식이나 석상 부조 모두 도드라진 것처럼 보이게 그린 그림이다. 마치 장식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급히 복원하느라 임시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처럼 보인다. 그게 아니라 이미 16세기부터 그렇게 만든 일종의 양식이라고 한다. 특히 동유럽 곳곳에서 처음부터 그림으로 꾸민 성당이나 궁전 벽을 많이 볼 수 있다. 중세 말이나 근대에 만들면서 처음부터 그림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비용이 적게 드는 장점도 있었을 것이다.

성채 위의 탑과 정원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체스키 크룸로프 구시가지

체스키 성 정원에서 멋진 전망까지 구경하고 구시가를 잠시 돌아다니며 카페와 기념품점을 구경했다. 내내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오느냐 좀 세게 오느냐의 차이였다. 맑고 밝은 날이었다면 예쁘게 색칠한 체스키 성과 알록달록한 구시가지가 정말 동화 같은 경치를 선사했을 거다. 비가 와서 공기가 우중충했는데도 색깔이 죽지 않았다. 밝게 빛나서 지나치게 환상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비에 젖고 꽤 추워서 따뜻한 차 한잔 마시려고 카페에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이런 날에도 사람이 많으니, 맑은 날은 어디 앉을 생각도 못할 것 같다. 인기 좋은 핫플레이스를 좋은 조건에서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북쪽을 향해 세 시간 남짓 걸려 프라하에 도착했다. 프라하에 흐르는 강도 블타바 강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를 굽이친 그 강이 북쪽으로 흘러 프라하도 관통한다. 체스키 크룸로프가 새로운 핫플레이스라면 프라하는 유럽 여행 선호도 1순위를 놓고 다투는 전통의 인기 관광지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구름만 많은 푸르스름한 여름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을 겸 구시가에 나갔을 때는 이미 저녁 8시가 넘었다. 하지만 6월 말 프라하에서 야경을 보려면 10시는 되어야 한다. 구름 때문에 어두운 편이었으나 사람들로 붐벼서 거리 분위기는 대낮 같았다. 프라하 구시가 관광의 핵심인 카를 교 근처는 벌써부터 야경을 기다리며 저녁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오래간만에 유럽의 소매치기 경각심이 되살아났다. 배낭을 옆으로 부여잡고 어스름이 깔리는 블타바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체코의 음악가 스메타나 동상이 있는 강변 카페를 지나 우리도 카를 교를 왔다 갔다 했다. 동상 중에서 다들 만지고 지나가는 개 모양도 만져가며 야경을 기다렸다.  

프라하의 저녁 시간 카를교는 역시 인산인해였다.

블타바 강변에는 프라하의 야경을 내세운 카페나 식당이 정말 많다. 유명한 곳은 예약 없이는 자리 잡기 어렵다. 늦은 시간 피곤하실 부모님과 천천히 저녁 먹으며 편하게 야경을 즐길 장소가 필요했다. 프라하 성을 바라보는 구시가지 쪽은 승산이 없어 보여서, 아예 성이 있는 쪽으로 건너가 카를교와 구시가지를 보는 쪽 강변의 식당을 찾아갔다. 프라하의 목표는 오로지 야경과 식사였으므로, 가성비는 포기하고 좀 비싸도 분위기가 좋을 듯한 곳을 골랐다. 카프카 박물관과 같은 건물을 쓰는 "Hergetova Cihelna"라는 레스토랑이었다. 비슷한 고급 식당이 몇 개 있는 중에서 어쩌다 들어갔는데, 모르고 간 것 치고는 매우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이 지역 전통 메뉴를 기반으로 한다는데 싸지는 않지만 정말 맛있었다. 강변 제일 바깥쪽 자리는 아니고 한 줄 안쪽 테이블이었으나 카를 교 야경을 즐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구름 낀 하늘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면서 어두워져 짙은 남색이 되어 갔다. 카를 교에 불이 들어오고 건물마다 조명이 켜지면서 그 유명한 프라하의 야경이 시작되었다. 연신 사진을 찍어 가며 늦은 저녁을 먹었다. 부모님의 취침 패턴으로는 10시쯤이면 누워있어야 할 시간이다. 야외 난로를 켜놓은 식당에서 예쁜 야경에 취해 있다 보니 저녁을 10시까지 먹었다. 그러고도 10시 30분이 넘도록 밤하늘이 까매질 때까지 카를 교 주변을 배회했다. 프라하 야경은 옛날부터 유명했지만 17년 전에 왔을 때보다 조명이 더 휘황찬란해졌다. 그때는 카를교와 언덕 위의 프라하 성 정도에 조명을 비춘 걸로 기억한다. 성이 잘 보이는 특정 장소에 배낭여행객들이 모여들었었다. 십수 년 만에 다시 와본 프라하는 야경에 목숨을 건 것 같았다. 눈길이 닿는 건물과 다리, 조형물마다 조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몇 시까지 켜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 사는 주민이라면 빛공해가 문제일 것 같다.


문득 오늘은 부모님과 함께 온 덕분에 대단히 호강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왔더라면 아무리 야경이 예뻐도 고급 레스토랑에 죽치고 앉아 있거나, 11시가 다 되도록 소매치기 우글대는 프라하 밤거리를 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경 욕심 많은 딸과 함께 여행 다니느라 피곤하신데, 피곤한 거 티 나면 구경을 덜할까봐 불평도 없이 열심히 같이 다니신 부모님께도 이 저녁이 호강으로 느껴지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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