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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26. 2019

검소한 모라비안의 성지 vs. 화려한 전후 복구의 상징

23일: 독일 헤른후트, 드레스덴

프라하에서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으로 올라가는 길은 쭉 뻗은 독일 아우토반으로 이어져 있다. 드디어 독일 고속도로다. 비넷도 톨게이트도 없는 무료에다 속도 무제한의 독일 고속도로는 유럽 자동차 여행의 천국이다. 지도상으로 같은 거리라도 그 길이 독일 고속도로라면 시간도 적게 걸리고 운전도 마음이 편하다.


이번 여행의 독일 루트는 아빠의 바람을 담느라 남쪽의 비교적 화려한 도시들이 아닌 베를린을 선택했다. 통일의 상징 베를린을 꼭 보고 싶으시다는 바람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바람은 헤른후트 방문이었다. 헤른후트는 유명 관광지는 결코 아니다. 모라비안(Moravian) 교회의 본부로 알려진 작은 도시다. 모라비안이라는 이름이 이국적이어서 처음에는 이단이나 사이비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모라비아는 동유럽의 한 지역명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분파인 보헤미아 형제회 신도들이 그 지역을 떠나 여기까지 이주한 것이다. 18세기 초 종교개혁에 반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피해서 이주를 거듭하다, 이곳 영주였던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이 정착지를 내주었다고 한다. 개혁주의 기독교 공동체로 검소한 생활과 기도 위주의 신앙 운동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해외선교에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른후트는 영 생소해서 위치부터 검색해야 했다. 마침 드레스덴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한적한 지방도로를 가다 보니 잘 정비된 마을이 나타났다.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소박한 마을이다. 마을 중심에 교회가 있고 그 뒤 길가에 안내소를 겸한 작은 박물관이 있다. 관광지도 아니고 주중 오전이라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장식성 없는 깔끔한 건물들은 미국 어느 도시 근교의 중산층 동네 같았다. 관광안내소를 겸한 작은 박물관 전시실에는 처음 정착기부터 현재까지 변화 과정을 그림, 사진, 소품으로 설명해 놓았다. 정착 당시 공동체 리더였다는 크리스천 데이비드(Christian David, 이름도 성도 너무 성경적이다)가 첫 집 지을 때 썼다는 도끼도 있다. 헤른후트(Herrn Hut, 주님의 보호)라는 이름도 그때 붙였다고 한다. 주택을 개조한 작은 박물관이라 전시품이 방마다 촘촘하게 놓여있다.

헤른후트 역사전시실과 교회. 조용하고 검소한 마을이다.

안내소 직원분이 친절하게 동네 약도를 그려 가며 갈 곳을 짚어주셨다. 마을 뒤편 길을 따라 좀 올라가면 이내 널찍한 공동묘지가 나온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묘지도 검소해서 바닥에 네모난 작은 돌판으로 이름만 써놨다. 도끼 주인인 크리스천 데이비드 씨 무덤도 똑같이 조그맣다. 이곳에 정착지를 내주고 본인도 공동체 일원으로 살았다는 진젠도르프 백작 일가 무덤만 석관 형태로 몇 개 나란히 놓여있었다. 중앙의 교회는 옛 모습은 거의 없고 딱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하얀 내부가 인상적이었다. 교회에 딸린 선교 홍보관에는 미국 감리교의 유명 신학자인 존 웨슬리 흉상도 있다. 모라비안 공동체의 신앙운동이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진출한 해외 선교 박물관도 따로 있다. 마침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해서 묘지와 마을 산책이 힐링이었다. 이런 데 살면 생활이 경건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헤른후트 마을 뒤쪽의 모라비안 교인들 묘지, 진젠도르프 백작 흉상

헤른후트 마을에 관광객이 먹을 만한 식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동네 골목에서 식탁 네 개짜리 조그만 식당을 겨우 찾아내 점심을 먹었다. 이곳 전통 가정식인 듯한 감자와 고기 요리였다. 시간이 멈춘 조용한 느낌의 헤른후트 마을을 떠나 다시 관광객 모드를 장착하고 드레스덴에 진입했다. 드레스덴 구시가 중앙 주차장을 찍고 곧바로 들어갔다. 헤른후트에서 오래 머무는 바람에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프라우엔 교회 앞의 루터 동상 앞에 섰다. 비교적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구시가 주차장도 여유가 있었다.


드레스덴은 2차 대전 막바지에 연합군 폭격으로 파괴된 대표적인 사례다. 전쟁의 파괴성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고, 지금은 구시가를 그 전과 똑같이 재건해서 재건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 동부의 중요 도시로, 통일 이후 다시 산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관광객에게는 완벽 복구했다는 구시가지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헤른후트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장식 없는 건물이 하나도 없는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중세 이래 작센의 왕과 제후들이 머물며 궁전과 구시가가 점점 화려해졌다고 한다. 근처에 도자기 산지로 유명한 마이센도 있다. 럭셔리 상품이었을 도자기가 넘쳐흐르는 부유한 도시였다. 바로크, 로코코 등 웬만한 미술 양식이 다 겹친 그 구시가가 2차 대전 때 완파되었다. 아빠는 1990년대에 한 번 와보셨는데 그때만 해도 상태가 한심했다고 한다. 지금은 츠빙거 궁전, 프라우엔 교회, 오페라 극장 등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검게 그을린 당시 돌들이 재활용되었다는데 그게 고풍스럽고 화려한 느낌을 더한다. 폭삭 무너졌다는 프라우엔 교회는 대체로 새 자재를 써서 하얗지만 군데군데 까만 돌들을 옛 자리에 끼워 넣어 주근깨처럼 점무늬가 있다.

드레스덴의 재건된 프라우엔 교회와 오페라극장, 왕실 성당

나에게 드레스덴은 삼 년만의 두 번째 방문이다. 삼 년 전에는 당시 다니던 회사의 높은 분들을 모시고 온 출장길이었다. 그때는 늦겨울이라 으스스하기도 했고 출장 일도 유난히 스트레스받는 건이었다. 모두가 예쁘다고 칭찬하는 드레스덴이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무슨 일로 누구와 오는지가 정말 중요하다. 6월의 화창한 하늘 아래 부모님과 다시 방문한 드레스덴 구시가는 어딜 봐도 예뻤다. 헤른후트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드레스덴에서 시간은 짧았다. 이때 그나마 삼 년 전 출장의 보람을 찾았다. 프라우엔 교회에서 시작해서 '군주의 행렬' 벽을 지나 츠빙거 궁전, 브륄의 테라스까지 주요 지점을 최단거리로 한 시간 만에 투어를 끝냈다. 브륄의 테라스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차 마시며 엘베 강 경치를 즐기는 것까지 완수했다.


고맙게도 날씨도 화창해서 검게 그을린 벽조차 빛나 보였다. 마이센 도자기 타일로 왕과 제후들을 그려 붙여 놓은 '군주의 행렬' 벽은 폭격 안 맞고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부분이라고 한다. 겨울 출장 때는 우중충해 보이기만 하더니, 여름 하늘 아래 관광객이 되어 다시 보니 군주들도 웃는 것 같았다. 츠빙거 궁전은 보물관과 회화관이 유명하다. 하지만 출장 때 경험에 비추어 내부 관람은 바로 스킵했다. 어차피 시간 내에 꼼꼼히 볼 수 없기도 하고, 겨울 출장 '답사' 차 구경할 때 엄청난 도자기의 압박이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 도자기 소유는 귀족들의 자부심이었고, 특히 이 지역 마이센 도자기 작품이 너무 많다. 대신 궁전 옥상이라 할 수 있는 테라스를 걸으며 햇빛과 구시가 경치를 즐겼다.

드레스덴 구시가지의 명물 '군주의 행렬' 벽과 츠빙거 궁전

고색창연한 구시가도 좋지만 월드컵 기간의 독일 도시는 또 다른 에너지가 있었다. 엘베 강변에 대형 화면과 응원석을 만들어 놓고 대대적으로 축구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사실 드레스덴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극우 민족주의 경향의 핵심 지역 중 하나기도 하다. 이민자 유입에 반발하고 신나치(Neo-Nazi) 완장과 깃발이 펄럭이는 시위가 있은 곳이다. 삼 년 전 출장 때 며칠 전에 폭력 시위가 있었다고 해서 살짝 걱정했었다. 월드컵 축구경기처럼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이벤트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헤른후트에서 세계 선교를 꿈꾸며 기도하는 사람들도, 드레스덴에서 옛 영광을 꿈꾸며 축구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독일 사람들이다.

드레스덴 엘베 강변 건너편, 월드컵 축구 경기 관람용 응원석을 크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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