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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29. 2019

우리 가족 맞춤형 베를린 통일 투어

24일: 독일 베를린

베를린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도시다. 동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장벽 때문에 한국에서는 베를린 하면 분단, 통일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모습은 나도 TV 뉴스를 통해 보면서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분단과 통일의 흔적도 물론 잘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분단 이전부터 수도였고 통일 후 다시 수도로서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동베를린에는 냉전 시기의 흔적도 있지만 그 이전 프러시아와 제국 시기 유산도 많다. 통일 이후에는 동베를린 재개발 지역이나 골목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기도 하고 카페나 바 문화도 발달했다. 최근 '힙'하다고 소문난 곳들이 많다고 한다. 서쪽의 초현대식 건물들과 포스트 모던한 전시들까지, 베를린은 관심사와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도시가 되었다.


부모님과의 여행에서 '힙'한 베를린의 모습은 알더라도 못 본 척할 일이다. 이번 방문 주제는 '통일'이었으므로 가 볼 지점들은 명확했다. 일반적인 필수 코스라는 연방의회 '라이히슈타크'나 며칠도 모자랄 '박물관 섬' 같은 곳은 일정에 들어올 수 없었다. 통일 관련 지점만 해도 하루에 다 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표적인 곳들만 추려냈다. 마침 숙소가 포츠담 광장 근처였기에 포츠담 광장을 기점으로 하루짜리 통일 투어를 시작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운터 덴 린덴 거리를 직진해 알렉산더 광장, 강변으로 이동해서 오베르바움 다리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다시 시내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까지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포츠담 광장의 통일정,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브란덴부르크 문

포츠담 광장은 현대식 빌딩으로 둘러싸이고 지하철과 기차가 지나고 베를린 필하모니가 인접한 번화가다. 통일 전에는 장벽이 너무 가까워서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만 덩그러니 있던 빈터였다고 한다. 통일 후 현대식으로 개발한 광장이다. 장벽이 있던 자리는 바닥의 줄로 표시되어 있다. 광장에 진입하는 길부터 장벽 자리 표시가 나온다. 장벽 흔적을 따라 광장을 가로지르다 보면 가운데 뜬금없게도 한국 정자가 있다. 이름도 '통일정'이라고 한글로 쓰여있다. 베를린의 한국문화원 주도로 2015년에 세웠다고 한다. 창덕궁의 낙선재와 똑같이 만들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동서독 통일의 상징적인 광장에서 한국의 통일을 함께 기원하자는 의미다. 베를린 시가 허가를 내준 것도 대단했다. 그 앞에 세로로 잘라낸 베를린 장벽 블록도 서너 개 있다. 한국문화원에서 구입해서 같이 전시했다고 한다. 낙서 가득한 콘크리트 장벽 조각과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정자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오늘의 통일 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포츠담 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가다 보면 유명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지난다. 진한 회색의 직사각형 기둥 수천 개가 무심한 듯 깔려 있는 넓은 추모비다. 낮은 것은 관 같기도 하지만 걸어 들어가다 보면 꽤 높아져서 시커먼 사각기둥 미로에 갇히는 느낌이 든다. 지하에는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사진이나 자료도 있다고 한다. 통일 주제는 아니지만 베를린에서 꼭 봐야 할 전쟁과 학살의 기억을 구현한 장소다. 그러다 나타나는 브란덴부르크 문은 상대적으로 너무 화려한 랜드마크다. 어쩌다 장벽이 바로 앞을 막아서서 분단과 통일의 상징이 되었지만, 원래 18세기 말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가 직선 대로인 운터 덴 린덴으로 통하는 멋진 대문을 주문 제작한 것이다. 장벽이 무너질 때 동서 베를린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통로로 개방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격렬하게 축하하는 바람에 훼손이 심각해서 한참 닫고 고쳐 2002년에 재개방했다고 한다. 이 날은 문 뒤에 설치한 월드컵 축구 경기 응원장과 스크린에 막혀 통과할 수 없었다.

나치의 분서 만행이 있었던 바벨 광장, 운터 덴 린덴 프리드리히 2세상, 알렉산더 광장 루터상과 마리엔 교회 뒤로 보이는 TV타워

브란덴부르크 문부터 슈프레 강 위의 박물관 섬까지 뻗은 운터 덴 린덴은 쉬지 않고 걸으면 25분쯤 걸리는 직선거리다. 통일 전에는 동베를린에 속했던 길이다. 체력 안배를 위해 버스를 타고 알렉산더 광장까지 바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훔볼트 대학 앞에서 한 번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훔볼트 대학 본관과 마주 보고 있는 바벨 광장은 나치가 캠프파이어하듯 책을 태웠다는 곳이다. 광장 중앙에 작은 유리판이 있는데 그 지하에 텅 빈 하얀 책장들을 형상화한 기념물이다. 유명한 훔볼트 대학 앞에서 책을 태우는 만행으로 표출된 맹목적 이데올로기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통일 포인트는 아니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운터 덴 린덴 한가운데 서 있는 프리드리히 2세 기마동상까지 눈도장을 찍고 다시 버스를 탔다.


박물관이 가득한 박물관 섬을 버스로 순식간에 지나 도착한 알렉산더 광장은 19세기 초에 이곳을 방문한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 1세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분단기 동독의 자존심과 같았던 TV타워가 우뚝 서있다. 중국 상해 동방명주 탑의 원조처럼 보이는 동그란 전망대가 인상적이다. 동독의 이 TV타워는 1960년대 당시 서독에 속한 브란덴부르크 문과 마주 보듯 세웠다고 한다. 광장은 큼직하고 단조로운 사회주의풍 건물들로 둘러싸여 별로 멋이 없다. 기차역부터 주변 쇼핑몰까지 계속 리모델링 중이다. 광장 규모로는 독일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통일 포인트로는 1989년 동독 말기에 자유화와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 장소로 의미가 있다. 강변에 가까운 공원 한쪽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을 따로 보존 전시한 장소도 있다.

슈프레 강변에서 본 오베르바움 다리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의 장벽들

알렉산더 광장 기차역에서 S-Bahn으로 세 정거장 이동해서 장벽이 많이 남아있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찾아갔다. 20세기 초부터 전철이 지나다녔다는 오베르바움 다리 근처가 이 장벽 미술관의 시작 지점이다. 오베르바움 다리도 분단 내내 끊어진 철길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허가받은 사람들(서독 사람들)만 도보로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독 쪽 강물에 빠진 아이들을 뻔히 보면서도 서독 초소병들이 구할 수가 없어 빠져 죽게 두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여기서 시작된 장벽 행렬은 1.3킬로가 넘는다. 2016년에 창고 건물을 고친 '장벽 박물관(Wall Museum)'이 생겼지만 대부분 관광객들은 실물 장벽으로 직행한다. 우리도 장벽 블록마다 그려진 개성 만점의 그라피티 그림을 하나씩 보면서 한참 걸었다. 유명한 벽화도 꽤 많아서 사진 찍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그로테스크하거나 불편한 그림도 있고 위로와 화해를 담은 것도 있다. 최근에 새로운 메시지를 담아 덧그린 것도 많다. 유난히 그라피티가 많은 베를린에서 장벽은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캔버스다.


장벽 구경으로 지친 다리를 쉬며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포츠담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연합국 군인들과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검문소였다고 한다. 지금은 매우 번화한 길 한가운데 미군 검문소를 재연해 놓았다. 원래도 상설 건물은 없고 가건물 형태의 검문소만 있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 유명한 '체크포인트 찰리 장벽 박물관'이 있는데, 장벽의 역사 중에서도 목숨 걸고 서독으로 탈출하던 동독 사람들의 탈출 방법과 스토리 위주로 전시한 곳이다. 십 년 전쯤 출장 때 들른 적이 있는데, 민간 박물관이라 가격이 꽤 비쌌다. 이번에 부모님과는 장벽 박물관 대신 2012년부터 맞은편에 생긴 냉전 박물관(BlackBox Cold War)을 가봤다.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세계의 냉전 사건들을 개괄한 박물관이다. 사건 위주로 잘 정리했고, 베를린과 장벽에서 있었던 일들도 사진과 기사, 영상으로 꾸며 놓았다. 주변에 파노라마 박물관, 트라비 박물관 등 냉전 시기 장벽과 동독에 대한 기록관이 많다.  

체크포인트 찰리와 그 옆에 있던 냉전 박물관 기록들

아침부터 열심히 움직인 통일 투어는 주제가 무거워서인지 꽤 힘이 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를 본 즈음 엄마는 체력이 소진되셨다. 엄마를 숙소로 바래다 드리고 남은 체력을 그러모아 아빠와 함께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를 방문했다. 서베를린의 대표 쇼핑 거리인 쿠담 거리 중간에 있는 이 교회 잔해는 통일 포인트는 아니다. 2차 대전 폭격으로 무너진 교회를 그대로 둔 반전의 상징이다. '통일'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한다. 19세기 말에 독일 통일을 이루고 제국을 세운 빌헬름 1세 황제를 기념하는 교회다. 역사 교과서에서 독일 통일 주역은 비스마르크지만 그때 그가 모신 황제다. 황제 사후 1895년에 완공했는데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도 벽 부조에 있다. 대단히 화려한 교회였는데 50년도 채 안돼 폭격으로 건물 일부와 첨탑 반토막만 남았다. 그걸 보존해서 기념관으로 쓰고, 본당 자리에는 지극히 모던한 새 교회를 지어 대비시켜 놓았다. 푸른 계열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모자이크처럼 가득 채웠다. 안에서는 푸른 색깔 때문에 신비로운 느낌이다. 밖에서 보면 모양이 너무 단순해서 포장 박스 같다. 1960년대에 완성했다 하니 80년 된 건물인데 너무 모던해서 적응이 잘 안된다. 똑같이 복원하는 것과 정 반대 방법으로 재건한 것인데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외관과 새 교회 내부

하루를 꽉 채운 베를린 가족 맞춤 통일 투어의 마무리는 다시 포츠담 광장이다. 거대한 파라솔 모양 지붕이 유명한 소니 센터는 분수를 둘러싸고 식당이 밀집해 있다. 독일에 관광객으로 왔으면 한 번은 먹게 되는 족발(학세)과 감자, 소시지 요리로 체력을 끌어올렸다. 족발이든 소시지든 맛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안 드는 게 독일 음식이지만, 칼로리가 엄청나서 하루 종일 움직이느라 바닥난 체력 회복에는 그만이었다.

한국도 통일이 되고 나면 '통일 관련 관광 포인트'들을 보러 다니고, 교육용이나 흥미 위주 박물관들이 관광 자원이 될지 궁금하다. 물론 베를린도 냉전적인 정치 편향성이 있는 상징물이나 기념물은 모두 제거되었다. 박물관 전시물이나 자료 사진으로만 있다. 한반도가 통일되고 그런 정비 과정을 거쳐 관광 코스로 외국인들을 끌어모으기까지 몇 년이 걸릴까? 독일 통일 이전에 '한국보다 독일이 더 통일되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그 예상이 보기 좋게 깨졌던 것처럼, 지금은 요원해 보이는 한반도의 통일과 이후의 과정도 예상외로 빨리 진행될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더욱 늦을 수도 있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면 각자 희망에 따라 상상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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