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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an 31. 2019

한국인에게 포츠담의 동의어는 그때 그 '회담'

25일: 독일 베를린, 포츠담 체칠리엔호프 궁전, 상수시 궁전

베를린에는 한국인 인구가 꽤 많다. 부모님도 나도 아는 사람이 있다. 일요일이라 부모님이 아시는 선교사님과 베를린 돔(Berliner Dom)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베를린 돔은 박물관 섬에 있는 베를린의 대표적인 교회다. 규모도 크고 엄청나게 화려하다. 개혁교회들이 대부분 심플하고 소박한데 여기는 차원이 다르다. 처음에는 왕실의 가톨릭 성당이었다가 16세기에 개혁교회로 바뀌었다. 개혁교회지만 제국의 대표 교회로 상징성을 갖추느라 여러 차례 개축하고 증축하여 오늘날의 모양이 되었다. 영어 동시통역기가 제공되어 외국인이 여럿 있었다. 영어 통역기를 쓰는 구역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아무리 봐도 기독교인은 아닌 듯한 사람들도 통역기를 꽂고 앉아있었다. 평일에 들어오려면 입장료가 만만치 않으니,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좋은 관광법이다.

베를린 돔 교회

한국 분들을 만난 덕에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행 33일 동안 한국 식당은 여기서 단 한 번 갔다. 햇반에 라면, 밑반찬을 좀 들고 다니기는 했지만 부모님도 제대로 된 한식을 거의 드시지 않았다. 한식 충성도가 덜했기 때문에 이런 여행이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오후 일정은 어디냐는 질문에 포츠담을 다녀온다고 대답했다. "상수시 궁전 좋죠"라는 대답 뒤에 바로 "포츠담 회담이 열린 장소도 있어요"라는 추천이 따라왔다. 우리도 그 두 곳을 갈 예정이었다. 상수시 궁전보다도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체칠리엔호프 궁전을 먼저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상수시 궁전이 훨씬 유명한 관광지지만, 한국 사람은 포츠담이라고 하면 그 유명한 1945년의 포츠담 회담이 먼저 떠오른다.


포츠담은 서울에서 분당 정도 거리에 있는 베를린 근교 도시다. 베를린보다 서쪽이지만 분단 시기에는 동독에 속했다.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직행하던 아우토반이 통과하는 도시였을 듯하다. 작은 도시고 프로이센 왕실의 사냥터였다고 한다. 18세기 프리드리히 2세때 상수시 궁전이 생기면서 제국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의 무덤도 상수시 궁전에 있다. 대부분 관광객에게 포츠담은 곧 상수시 궁전이다.


상수시 궁전 외에도 포츠담에는 궁전이 꽤 많다. 체칠리엔호프 궁전도 그중 하나다. 2차 대전 막판에 포츠담 회담이 열려서 유명해졌다. 원래 독일 호헨촐레른 왕가의 왕세자였던 빌헬름과 세자빈 체칠리아의 거처였다. 1910년대에 빌헬름 2세가 왕세자 부부를 위해서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이름부터 선물답다. 1917년에 완공했다는데, 다음 해 1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황제가 퇴위하고 제국이 끝났다. 빌헬름 2세와 왕세자는 망명했고, 체칠리엔호프는 체칠리아 세자빈이 아이들과 머문 거처가 되었다. 세자빈은 1945년 2월, 소련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떠났다. 20년 넘게 조용히 살던 곳이다. 왕세자는 중간에 독일로 돌아와 정치에 기웃거리고 히틀러와도 교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람둥이라 부부가 같이 산 적이 거의 없단다. 이 궁전은 전적으로 체칠리아 세자빈의 생활이 밴 곳이었다. 그래도 왕세자를 위한 흡연실이나 서재가 다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을 떠난 적이 거의 없는 세자빈이 마치 '항해 중인 배의 선실처럼' 꾸민 작은 응접실이 인상적이다. 맘대로 떠날 여건이 안 되는 상황에서 갑갑한 마음을 달래던 거라면 안쓰럽기도 하다.

체칠리엔호프 궁전 전경과 배의 선실처럼 꾸민 세자빈의 방

체칠리엔호프 궁전 모양은 궁전이라기에는 좀 어색하다. 시골의 큰 저택 같다. 전체적으로 갈색 조의 벽돌과 목재를 썼다. 주변 정원도 '영국식'이라며 정형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숲처럼 이어진다. 아들 부부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도록 선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곧 제국이 끝나서 진짜 오붓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게 되었다. 물론 1차 대전 이후 독일 국민들의 피폐했던 삶에 비하면 호화롭지만, 유럽의 웬만한 귀족보다 검소한 삶이었음은 분명하다. 2차 대전 말에 체칠리아 세자빈이 떠나고 곧 소련이 점령했고, 다섯 달 뒤 7월과 8월에 걸쳐 그 포츠담 회담이 열렸다. 이미 히틀러도 죽고 독일은 항복한 후였으므로 독일 어디든 회담이 가능했다. 베를린에서 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남은 건물이 없어서 이곳이 되었다는 배경은 유명하다. 작은 도시였고 이 궁전은 그중에서도 소박한 개인 주택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폭격당하지 않고 남은 것이다.   


2차 대전 승전국 3인방의 회담은 포츠담 이전에도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이 있었다. 다 전쟁 이후 세계질서를 결정한 중요한 회의다. 포츠담 회담은 독일이 항복한 후 일본의 항복 유도와 처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인 자리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시기다. 그래서 2차 대전의 마무리와 냉전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회담의 주도권은 소련에 있었다. 장소가 소련 점령지이기도 했고, 스탈린만이 꾸준히 모든 회의에 참석한 최다 경력자였다. 얄타 회담까지 주도했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망해서 트루먼이 참석했고, 영국 처칠 수상은 회담 도중에 영국 의회 선거에서 패하는 바람에 귀국하고 신임 애틀리 수상이 교체 참석했다. 세 지도자들의 취향과 생활패턴을 반영해서 방 구조와 가구도 바뀌었다. 회담장도 3국 수뇌의 배치에 신경을 쓴 당시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다. 정보 탐색과 계산이 난무했지만 저녁엔 음악회도 하고 파티도 열었다고 한다. 소련의 관리 하에 있었기 때문인지 궁전 중정의 화단이 대형 붉은 별로 바뀌었는데 그 모습도 유지하고 있다. 너무 명확한 붉은 별 하나로 채운 화단은 좀 당황스럽다. 당시에 처칠이나 트루먼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2차대전 마무리를 위한 포츠담 회담이 열린 방과 붉은 별 무늬의 본관 화단

사실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조선)은 화제가 아니었다. 체칠리엔호프 궁전의 오디오 가이드는 한국어도 있다. 회담 전후 사정과 회담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만 한국에 대한 내용은 없다. 항복한 독일의 처리와 곧 항복하게 만들 일본에 대한 전략을 정하는 게 목적이었다. 한국에 대한 공식적 언급은 '카이로 회담 합의에 준함' 정도만 나왔다고 한다. 그건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킴'이라는 내용을 되풀이한 것이다. 신탁통치라는 방안이 공식화된 것은 일본 항복 후의 모스크바 3상 회의다. 공식 언급은 없었다 해도 이미 신탁통치나 남북 분할 점령 방안이 나왔을 거라는 추측도 많다. 실제 언급이 되었든 아니든, 한국의 독립과 분단, 이후 정치적인 구도가 당시 승전국이었던 몇몇 수뇌부의 전략적 계산으로 결정되었다. 한국뿐 아니라 승자 쪽과 패자 쪽을 불문하고 모든 국가와 사람들이 살아야 했던 반 세기를 만들어낸 회담이다. 그래서 세간의 주목을 피해 살던 전 독일제국 세자빈의 궁전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자 기념관이 되었다.


한국은 언급 안 했다는데도 모든 한국인에게 포츠담이라는 키워드를 각인시킨 회담이었다. 그 장소에서 세세한 오디오 가이드를 듣다 보니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상대적으로 화려한 휴식처라는 상수시 궁전으로 갔다. 상수시 궁전의 이름은 '걱정이 없다'는 뜻이라 한다. 소박하고 조용했을 체칠리엔호프 궁전이 20세기 후반의 세계질서를 계산하느라 정신없는 장소가 된 것처럼, 상수시 궁전도 이름처럼 편안한 삶이 지속된 곳으로 보기는 어렵다. 18세기 프러시아를 이끌며 대왕이라 불린 프레드리히 2세가 여름용으로 지은 궁전이다. 평생 많은 전쟁을 치르며 군사적인 성공으로 가득한 경력과는 달리 섬세하고 예술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도피처였던 곳이다. 여기서 지낸다고 진짜 도피가 되었을 리는 없으니 희망사항을 반영한 곳이다. 그래도 개인 취향대로 포도밭이며 연회장을 우아하게 꾸미고 음악과 문학, 미술작품을 즐기는 장소로 만들었다. 후대에 궁전은 많이 확장되어서 지금은 건물도 많고 부지가 매우 넓다. 프레드리히 2세가 지냈다는 본관만 오디오 가이드로 돌아보았다. 스트레스 많은 삶을 살면서 '철학자로 죽고 싶다' 했다던 왕은 말년에 아끼던 개들만 데리고 지내면서 외롭게 살다가 안락의자에 앉아서 죽었다고 한다.

상수시 궁전은 층층계단 포도원이 유명하다.

숨 쉴 구멍 같은 곳이었기에 죽어서도 여기 묻히기 원했다더니, 그 유명한 왕의 무덤이 궁전 정원 한쪽에 있었다. 사실 후계자들이 유언을 어기고 왕실 교회에 장례를 했다가, 2차 대전 때 폭격을 피해 관을 옮기기 시작해 분단 내내 서독을 전전했다고 한다. 1991년에 이장해서 겨우 유언대로 여기 묻었다는 이야기였다. 1786년에 죽었다는데 무덤은 200년 넘게 지난 후에야 원하던 곳에 자리 잡았다. 항상 죽음을 의식하고 철학적, 예술적으로 준비했다는 왕이었지만 시대는 그의 바람과 무관하게 흘렀다. 포츠담에서 전후 세계질서를 놓고 전략 싸움을 하던 3국 수뇌도 각자 원하던 그림이 있었을 것이다. 다 지난 지금 되돌아보는 입장에서는 그때 스탈린의 빅 픽처가 어땠고, 트루먼의 전략적 의도가 뭐였고 등등 분석을 한다. 하지만 진짜 속셈들이 뭐였든, 그 바람대로 된 게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그중 누구도 언급조차 안 했던 한반도에서 불과 5년 후에 3년짜리 전쟁이 일어날 줄 알았거나 의도했을 리는 없다. 하루 앞도 예측하지 못하고 치열하게 계산하며 발 뻗을 곳을 찾는 것은 시대과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다들 마찬가지다. 잠시라도 '걱정이 없는' 삶을 꿈꾸던 상수시 궁전과 조용히 삶을 이어가는 게 목적이었던 체칠리엔호프 궁전은 그런 불확실성과 치열함으로부터 좀 멀어지려는 희망을 반영한 곳들이었다. 불가능했던 희망이라 감상도 왠지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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