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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림 Jan 18. 2022

온전히 밤

(밤이 깊었네)

언제나 궁금했다. 만화 <천사소녀 네티>의 주인공 네티는 어떻게 밤에도 활기가 넘칠까? 네티는 낮엔 평범한 소녀지만 밤이 되면 긴 머리를 높이 묶고 방 창문으로 살짝 빠져나와 요술봉을 휘두르며 행복을 나눠주러 다닌다. 미스터리다. 사람이, 그것도 한창 성장기인 소녀가 어떻게 밤에 잠도 안 자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나는 봄이 시작되는 문턱의 어느 낮 1시 30분에 태어났다. 따사로운 봄빛을 맞으며, 한낮의 햇빛을 맞으며. 그래서일까? 밝음에 익숙하고 온기에 익숙하다. 어두운 밤보다 부서지는 낮을 좋아한다. 바꿔 말하면, 밤과 어둠에 약하다. 밤의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의 기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 댄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네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빌 에너지가 나지 않는다. 사고와 감각이 속절없이 떨어져 도무지 밤의 무드를 즐기질 못한다.


어떤 이들은 밤에 안 다녀 버릇해서 그런다고, 습관일 뿐이라고, 그러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건 내가 그래야지 해서가 아니라 몸이 그렇게 제 스스로 반응해버리고, 반대로 내가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노력해도 저절로 움직여버리기 때문이다.

 

몸의 반응뿐이 아니다. 마음도 동한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슬금슬금 불안해진다.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야 할 것만 같다. 이게 무슨 신데렐라 코스프레냐고 하겠지만, 나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고충 중 제일은 야맹증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또렷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어릴 적 나는 계단으로 된 빌라 3층에 살았다. 이 빌라 계단이 얼마나 좋았으면 내려갈 땐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고, 올라올 땐 입술이 닿을 정도로 엎어지기 일쑤였다. 계단을 제대로 못 오를 나이도 아닌데 이상하게 자주 구르고 엎어졌다. 칠칠치 못하게 눈을 제대로 안 뜨고 다녀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마도 눈으로 뭘 제대로 못 봐서 그랬나 보다. 그만큼 밤눈이 어둡다.

   

밤이면 가로등이 어둠을 밝혀주려 애쓰지만 그것도 별 도움이 못 된다. 요즘도 밤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길 여러 번이고, 환하게 라이트를 켜고 달려오는 자동차를 마주 보고 걸으면 정신이 혼미하고 현기증이 인다. 시각이 흐리니 생각도 흐리다.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불안하다.

   

불안은 공포를 키우고, 그러다 보니 밤의 움직임을 움츠리게 만든다. 약속을 잡거나 외출을 하려거든 되도록 낮에 움직이고 해가 질 때쯤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 약속이 제일 부담스럽고 거기에 술까지 한잔 곁들이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모처럼의 떠난 여행에서도 일정은 대부분 낮에 집중된다. 오죽하면 2만 개의 조명이 자아내는 풍경이 압권이라는 파리의 에펠탑 야경도 억지로 보러 갔고, 결국 “에펠탑도 밤보다 낮이 낫다.”라는 감상만 남았다. 어둠에 눈이 흐려지니 아름다움을 보는 눈까지 어두워지는 기분이다.

 

순응하고 살다가도 가끔은 낮과 밤은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한쪽의 모습에만 치우쳐 사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나도 반짝이는 서울의 야경을 보고 싶고, 사람 수보다 가로등 수가 많은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와인을 맛보고 싶고, 낮에 쓴 글을 읽고 밤 글을 쓰고 싶다. 가장 어두운 시간의 풍경과 동이 터오는 경계를 느껴보고 싶다. 가장 조용하고 세상이 멈춰 있는 시간을 느껴보고 싶다. 나도 깊은 밤을 온전히 쓸 수 있다면 나의 세상은 지금과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깊은 밤을 온전히 쓸 수 있다면 내가 보는 시야와 생각과 마음 씀의 깊이도 다르지 않았을까?


낮이 파삭한 스콘이라면 밤은 부드러운 티라미수다. 낮이 상쾌한 맥주라면 밤은 달콤한 와인이다. 낮이 뜨거운 태양이라면 밤은 촉촉한 별빛이고, 낮이 강렬한 만남이라면 밤은 촉촉한 이별이다. 나에겐 여전히 미지의 세계인 밤. 언젠가 낮과 다른, 밤의 맛을 글로 써보고 싶다. 깊고 깊은 그 밤, 그 맛을 글로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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