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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잔잔 Oct 26. 2020

너를 아끼는 만큼 샛노란 단호박 수프

따뜻하고 뭉클한 맛

1.

어제는 조그맣고 소박한 2주년을 맞이한 날.

생각만큼 큰 감흥은 없었지만 맛있는 새우크림 로제 파스타도 먹고 집에 돌아와 짧지만 깊은 낮잠도 잤다. 오랜만에 꽤 먼 곳까지 가서 꽤 긴 시간을 보내고 온 것에 의미를 두면 그런대로 좋았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는 투명 OPP 비닐봉투에 담긴 편지를 받았다. 마땅한 편지 봉투를 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거기에 담았다고 했다. 온전히 잠이 깬 뒤에 읽고 싶어 머리맡 어딘가에 제쳐 두었다가 편지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삼십 분 뒤 "편지 읽었어?" 하는 소리에 '아, 맞다. 편지가 있었지.' 생각하며 그제야 꺼내 읽어보았던 편지. 본인을 닮은 캐릭터가 그려진 편지지에는 그동안 함께 했던 재밌었던 일들에 대한 추억이 오밀조밀, 너무 진하게는 아니고 가볍게 담겨있었다. 다 읽고 문득 그토록 편지를 좋아하고 잘 쓰는 내가 막상 2주년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로 넘어가도 괜찮았지만 일 가기 전까지 시간도 남았겠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답장을 하기로 했다. 근처에 있던 연습장을 찢어 몇 자 적었다. 십 분도 안되어 받은 것보다 긴 편지가 탄생했다. 화장실에 간 사이 급하게 가위로 찢어낸 부분을 도려내고 책상에 올려 두었다. 또박또박 쓴 편지를 읽고 저쪽에서 한 마디 했다. "웃기다. 신기하다는 말." 뜨끔하면서도 웃기다고 생각해주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태연하게 웃었다. "그렇다니까."


오랜 시간 동안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좋아해 주는 네가 정말 신기해

나는 분명 편지에 그렇게 적었다.

 

2.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쉬는데 부엌 한편에 놓여 있는 단호박이 눈에 띄었다.

아, 잊고 있었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오랜만에 내 단호박 수프를 먹고 싶다는 네 말이 떠올라 꼼꼼하게 골라 왔었지. 2주년 때 해주고 싶어서. 마침 오후 일정도 간만에 여유로워 점심을 먹고 단호박 수프를 만들어 저녁때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흥적으로 전화를 걸어 "단호박 수프 해서 저녁에 갈게"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이 요리는 재밌는 추억이다. 만나기 전(만날 거라고 조금도 상상하지 않았던 시절) 요리 수업에서 같은 조가 된 적이 있는데, 평소 요리에 관심도 많고 자부심도 있던 내가 오바해서 만든 요리가 바로 이 단호박 수프다. 그냥 적당히 몇 가지 요리를 함께 완성하면 될 것을, 단 번에 눈에 띄는 메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조원들에게 밀어붙인 메뉴.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불 앞에서 젓고 또 저어 완성시켰다. 처음 만들어보는 단호박 수프의 맛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느끼했다. 양 조절에 실패해 마녀의 수프처럼 커다란 냄비에 담긴 수프는 그렇게 인기 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많이 남았던가, 결국 누가 다 먹어줬나. 아무튼 훗날 우리는 여러 번 그 추억을 사진처럼 곱씹곤 했다. "그때, 기억나? 단호박 수프까지 만들었던 거. 정말 웃겼다니까. 혼자 전날에 미리 만들어보기까지 하고." 그 이후에는 내가 오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만드는 수고로움도 만만치 않아 다시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네가 지나가듯 요즘 이 수프가 먹고 싶다고 한 말이 내게 무의식 중에 또렷하게 남아서 그래서 뭐, 한 번 만들어 주지. 추억을 되살려 주지.라는 마음으로 단호박을 사둔 것이다. 그렇게 부엌 어딘가에 내버려 뒀다가 하루가 지난 오늘에서야 요리할 엄두가 났다.


3.

단호박 수프는 상당히 정성이 많이 가는 요리다.

두꺼운 껍질에 칼을 넣어 반으로 가른 다음, 속의 씨앗을 파낸다. 조그마한 단호박 안에도 씨앗이 끊임없이 숨겨져 있어서 파내다가 흠칫 놀랐다. 이걸 심으면 싹이 틀까, 단호박을 어딘가에 심어볼까, 대략 삼사십 개에 가까운 씨앗을 한쪽에 치워두며 생각했다. 아니면 당근 마켓에 나눔 하면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을까? (참고로 에어 프라이기를 안 가져가서 내 속을 애타게 했던 꽃다발님은 결국 오늘 찾으러 오셨다.) 그리고 다시 여러 등분으로 호박을 자른 뒤, 두꺼운 껍질을 과일 깎듯이 깎아 내야 한다. 이때가 제일 고생스러운 부분이다. 힘을 주어 큰 칼을 다루기 때문에 손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은 물론 여기저기 노란 단호박 속이 묻어 미끌거리기 때문에 영 쉽사리 껍질이 잘리지 않는다. 다 먹고 난 수박 밑동처럼 자른 단호박은 빨리 익을 수 있도록 다시 된장찌개의 두부 크기 정도로 뭉떵 뭉떵 자른다. 절반 정도 하다가 나머지 절반은 잡을 여력이 안되어 잠시 중단. 이번엔 수프의 감칠맛을 내줄 양파를 볶음밥용 크기로 잘게 다져 냄비에 식용유를 두르고 볶기 시작한다. 타지 않도록 잘 저어두다가 캐러멜 색깔이 나오기 시작하면 썰어 놓은 단호박을 넣고 함께 볶는다. 그러다 물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서 주걱으로 연해진 단호박을 사정없이 푹푹 눌러 으깨줘야 한다. 아마 이쯤 머리가 멍해지고 땀이 삐질 삐질 났던 것 같다. 절대로 물러지지 않을 것만 같던 단단한 호박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으스러지기 시작한다. 소금을 넣어 간을 조금 한 다음, 불을 끄고 차가운 우유를 투하. 여기에 다시 꿀을 두 스푼 넣어 최소한의 단맛을 잡아주고 믹서기로 옮긴다. (뭐시라?) 그렇다. 믹서기로 곱게 갈아주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 입 넣었을 때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단호박의 푸근한 맛이 제대로 느껴진다. 덜덜덜. 나의 노후한 믹서기가 최선을 다해 열을 내며 돌아간다.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뚜껑을 열어 숟가락으로 맛을 본다. 아, 좋아라. 수프의 짙은 맛을 더해줄 버터도, 생크림도 없어 맛이 날까 했는데 성공이다. 너무 달지 않지만 간은 딱 맞는 나만의 단호박 수프. 내가 먹을 양만 텀블러에 담아 홀짝홀짝 마시며 이건 글로 써야 해,라고 생각했다. 


4.

두어 시간 동안 들인 내 정성만큼 샛노랗던 단호박 수프는 내 마음 같았다.

오로지 너를 위해, 네가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 모든 수고를 넘어 만들어진 요리.

2주년에 나는 변치 않는 네 마음이 신기했고, 막상 나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뒷걸음쳐지기도 하고 그랬던 게 사실이지만 이 단호박 수프만큼은 너를 아끼는 마음이 순수하게 드러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곧 과거가 될 지금의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정성을 쏟은 이 날의 이야기를 고이고이 남겨두고 싶었다. 그런 예쁜 마음은 소중하지만, 또 빠르게 사라지고 잊히기 쉬운 마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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