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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잔잔 Oct 29. 2020

공모전에 모두 떨어졌다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1.

하필이면 상쾌한 아침에 문득 떠오른 것이다.

오늘 드디어 공모전 결과가 나왔겠구나.

생각이 스쳐 지나갈 새도 없이 그보다 더 빠르게 손가락이 자판 앞을 앞질러간다.

거의 엎어지듯 ㅇ과 ㅜ와 ㅓ사이를 쏘다니며 1초도 안되어 하나의 낱말을 완성하고 주최 사이트로 접속한다.

눈 감고도 칠 수 있는 익숙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공지사항에 들어가자

<OO 주최 공모전 최종 결과 발표> 게시글이 떠 있다.

달음박질하듯 스크롤을 내리지만 내 이름은 없다.

급하게 10월 초부터 기다렸던 다른 공모전의 결과도 살펴보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낙방.

대단하게 공들이지는 않았어도 내심 기대하며 날짜를 세고 있었다. 그 날이 오겠지, 어서 와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다 결국 오늘에서야 입선에도 들지 못한 결과와 정면으로 박치기를 하고 머리가 띵해진 것이다.


2.

너무 커다란 일에 부딪혔을 때나, 실망감이 어마어마한 일에 부딪혔을 때 나는 빠르게 체념하는 특징이 있다.

오히려 작은 일들에 무던하지 못하여 하루 종일 내 안의 소심한 생쥐가 정신을 갉아먹는 편이다. 예를 들면 남들은 해외에서 캐리어를 잃어버리면 멘탈이 나간다는데 나는 버스에 두고와도 태연한 편이다. 한 번은 마카오 공항에 막 도착하여 호텔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탔는데, 풍경을 보다 불현듯 생각이 났다. 버스를 탈 때 내 손 어디에도 캐리어의 흔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조심스레 함께 간 친구에게 "우리 캐리어..."하고 말을 건네자, 해맑게 창문 밖 풍경을 찍고 있던 친구의 표정이 바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때부터 친구는 "어떡해, 우리 어떻게 해?" 중얼거리며 여행의 첫날부터 맞닥뜨린 이 재난의 상황에 멘붕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런 친구의 손을 잡고 괜찮아, 다시 가서 찾으면 되지라고 몇 마디 위로를 건넨 뒤에 다시 풍경을 감상했다. 카지노로 유명한 이국의 풍경은 사실 서울의 양화대교과 비슷할 정도로 특별할 게 없었지만, 내 눈에는 강을 비추는 햇살 하나하나도 특별해 보였다. 비록 캐리어를 통째로 잃어버린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바로 별수 없지, 생각하며 훌훌 털어버렸다. 너무 큰 사고에는 미련 없이 체념하고 매달리지 않으려 하는 성향이 유감없이 발현된 순간이었다.


3.

그래서 줄줄이 이어진 공모전의 낙방 소식을 눈으로 확인하자 내 마음속에서 역시나 빠른 태세 전환이 이루어졌다. 흠 흠, 그래. 그게 될 만한 글은 아니었지. 그게 수상했다면 잘 써서 낸 다른 사람이 좀 억울했겠지.

마음속에서는 오랜 기다림이 1초 만에 실망감으로 바뀐 충격이 다 가시지 않았지만 태연한 척 노트북을 끄고 '아침 감사일기'를 썼다. 그 뒤에는 새김치와 김에 아침밥을 씩씩하게 먹고, 영어 회화 사이트에 들어가 오늘 수업을 앞당기고, 새로운 선생님과 화상 영어로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진 아르바이트 일정들도 무사히 연달아 소화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4.

여러 일정들과 일상을 소화하면서 중간중간 잠깐이라도 곱씹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엄마와 통화를 끝낸 지금, 자정에 가까운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오지 못했던 트림처럼 내 마음속에 공모전에 대한 아쉬움이 삐죽 솟아 나와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도 역시사람인지라 초연할 수 없었던 걸까? 의식하지 못한 새 아침부터 깊은 절망에 빠져있었나? 아닌데, 이런 체념한 일에는 뒤끝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사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애꿎은 불똥이 이리로 튀어왔다. 어렵게 구한 미스터 트롯 티켓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오늘 아침에 있었던 낙선까지 물귀신처럼 끌어내어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든 것이다. 나 오늘 공모전에 다 탈락했다고.


5.

엄마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나한테 물어보고 사지", "정말 내가 못살아", "그 비싼걸 왜", "다시 팔아"를 연달 하며 어제부터 티켓 이야기를 할 생각에 부풀어있던 내게 한숨을 푹푹 쉬었다.

엄마, 나 미스터 트롯 티켓 정말 힘들게 구했어.

내 속도 모르고 왜 엄마는 자꾸 짜장면이 싫다고 해.

엄마가 무슨 god야?

평소에는 미스터 트롯 좋다고만 하더니.

갑자기 코로나도 무섭다 하고,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얹어서 안 가려고 해.

그냥 말없이 기뻐해 주고, 신나서 어서 가고 싶다고 해줬다면 좋았을 걸. 그러면 내 마음도 덩달아 물웅덩이를 처음 밟아본 아이처럼 울렁울렁 파도쳤을 텐데.


6.

아니야. 사실 엄마는 그럴 수 있지.

나라도 내가 요리 좋아하지만 갑자기 고든 램지가 방문한다는 어느 도시 요리 페스티벌에 가라고

등 떠밀면 낯설기도 하고 난감한 마음도 들겠지.

사실 내가 오늘 공모전에 다 떨어지고 아르바이트에 지쳐 늦게 돌아와 그런가 봐.

엄마가 마냥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god 가사처럼 짜장면이 싫다고 억지로 거짓말은 안 했으면 좋겠고, 그랬어.

오늘 내 마음이 그랬어.


7.

그래도 미스터 트롯 콘서트는 갈 거지, 엄마?

난 엄마가 가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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