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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은서른아홉부터 Jun 22. 2024

게으른 개구리 왕국

남에게 미루기 좋아하는 당신을 위한 글

옛날 옛적, '게으름왕국'이라는 개구리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빛나는 푸른 이슬이 아침과 저녁으로 맺혀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먹을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보물이 가득해 너무너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그곳에 사는 개구리들은 모두 게으르고 남에게 일을 미루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 왕국의 왕, '느림보왕'은 그 습관이 가장 심했습니다.


어느 날, 느림보왕은 옆나라의 부지런 왕국을 쳐들어가려다, 고도로 훈련된 개구리들의 튼튼한 방어와 그리고 높고 단단한 성벽덕에 사냥을 실패한 뱀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나서서 일을 하기 싫었던 왕은 신하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네들, 소식 들었나? 옆나라 부지런 왕국을 공략하려다 실패한 뱀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네, 그러하니 경계를 강화하고 연못을 둘러쌓고 있는 돌담을 더 높고 튼튼히 쌓아보시게.'


왕의 명령을 받아 든 나바빠 개구리가 첫 번째 신하인 빈둥이천재에게 찾아갔습니다.


첫 번째 신하, 빈둥이천재는 아름다운 개구리들을 겨드랑이에 끼고 기름진 잔치를 벌이고 있다가 살이 쪄 축 늘어진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을 벅벅 긁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빠서 할 수 없어. 차라리 저기 있는 늘어지기 달인에게 부탁해 보게."


늘어지기 달인은,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 공상에 빠져 있다 낮잠 자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 그날도 공상에 빠져 있다 나바빠 개구를 보자마자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기엔 난 시간이 부족하네. 차라리 저기 꾸구리에게 부탁해 보게."


꾸구리는 꾸물거리기 좋아하고, 한 번도 자기 스스로 삶을 주도해 본 적도 없고, 그냥 태어난 김에 사는 그래서 대충 남이 차려 준 밥상에 숟가락 얹는 거만 하기를 좋아했는데, 왕의 명령을 받아 들고선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바쁘게 도착한 나바빠 개구리를 물 한잔 떠주지도 않고 한참 바라보고 꾸물거리더니 똑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할 일이 많아. 게으른 꿈쟁이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네."


이렇게 서로 일을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아무도 경계를 강화하지도 않았고, 연못을 둘러쌓고 있는 돌담을 손보지 않았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답니다. 깜깜한 어둠, 별님조차 달님조차 숨죽인 밤.


날벼락처럼 뱀들이 반쯤 허물어진 돌담을 부수고 게으름 왕국으로 쳐들어왔어요. 마침 돌담옆에 초막집을 짓고 살던 꾸구리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늘어지기 달인의 집으로 찾아갔답니다. 


"이보게, 이보게 날 좀 살려주게, 뱀들이 처 들어왔다네!"


그때도 늘어지기 달인은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뱀들이 늘어지기 달인의 집으로 쳐들어왔고, 침대에 누워 공상에 빠져 있던 늘어지기 달인은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꾸구리와 함께 빈둥이 천재의 집으로 찾아갔어요. 빈둥이 천재는 그때도 술에 취해 빈둥거리고 있었어요.


"여보게! 빈둥이천재! 뱀들이 쳐들어왔다네! 우리들을 좀 숨겨주시게!"


숨이 넘어간 것처럼 헐떡거리는 두 개구리를 보고도 빈둥이 천재는 술에 잔뜩 취해 늘어진 배를 벅벅 긁으며 나와 말했어요.


"거참, 대충 하다 갈 것이라네, 그냥 어딘가 잘 숨어 계시게나."


그때였어요. 또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빈둥이 천재의 집으로 뱀군단이 처 들어왔어요. 뱀의 큰 아가리에 찔껑하는 소리와 함께 빈둥이천재와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아름다운 개구리들이 속수무책으로 붙잡히기 시작했고 꿀꺽꿀꺽 참 맛나게도 뱀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어요.


파랗게 질린 꾸구리와 늘어지기 달인은 마지막으로 느림보왕의 왕국으로 도망을 갔답니다. 당장 뱀이 쳐들어왔는데 그때도 느림보왕은 누군가가 해결해 주겠거늘 남에게 미루며 느릿느릿 왕궁 안 정원을 배회하고 있었답니다.


"전하! 뱀들이! 뱀들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덕에 꾸구리와 늘어지기 달인은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숨을 헐떡거렸고, 금방 꾹꾹 하는 소리를 내며 픽 쓰러져 다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어요.


우당탕!!! 하는 소리를 내며 결국은 게으름왕국으로 뱀들은 처 들어오고 말았고, 뱀의 아가리에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느림보왕은 말했답니다.


"아무도 이 상황을 처리할 개구리가 없었단 말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결국 아름다운 왕국이었던 게으름왕국은 뱀들의 소굴이 되었고, 녹조와 더러운 냄새만 가득한 죽음의 연못으로 바뀌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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