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여행기 1
포틀랜드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서버에게 물을 부탁했더니 "탄산수, 병에 든 생수, 최상급 포틀랜드 물 중에 어떤 걸로 드릴까요?"라고 묻길래 최상급 포틀랜드 물이 뭐냐고 되물었더니 "최상급 수질을 자랑하는 우리 포틀랜드의 수돗물"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말하는 본인도 쑥스럽긴 했는지 피식하는 작은 미소도 함께 곁들이며. 그 말을 듣고 이 곳 사람들은 도시 수질에마저 자부심을 느끼는 건가 싶어 참 포틀랜드 답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포틀랜드는 정말로 알아주는 물맛을 가진 도시였다. 이 맛 좋은 물로 커피를 내리고 맥주를 제조하니 맛이 있을 수밖에!
포틀랜드는 비어바나(Beervana, 맥주를 뜻하는 Beer와 해탈을 뜻하는 Nirvana의 합성어)라는 별명에 걸맞게 맥주의 공급도 수요도 엄청나며 양질의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이 수십 개나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처음 발견한 포틀랜드산 맥주는 로그(Rogue)였다. 마트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로그의 헤이즐넛 브라운 넥타(Hazelnut Brown Nectar)의 커다란 병엔 처음 본 사람도 쉽게 기억할 법한 독특한 그림의 라벨이 둘러져 있었다. 오비라거가 오비라는 이름의 라거인 줄도 모르고 마시던 내가 넥타가 무엇인 지 알 리 만무했지만, 나는 순전히 헤이즐넛이라는 단어에 홀려 그 큰 병을 집어 들어 집으로 고이 모셔왔다. 첫 모금부터 부담스럽지 않은 고소함과 달콤함으로 무장했던 그 맥주를 나는 여전히 즐겨마신다. 로그의 또 다른 복병 더블 초콜릿 스타우트(Double Chocolate Stout)와 섞어마시면 누텔라를 연상시키는 맥주로 변신하기도 한다 (실제로 브루펍에서 볼 수 있는 메뉴다). 그때를 시작으로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로그 맥주들이 조금씩 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특이하고 실험적인 맥주를 제조하기로 유명한 로그는 맥주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나를 수제 맥주의 세계로 인도한 선구자와도 같았다. 그런 이유로 포틀랜드 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먼저 마음속에 떠올랐던 건 로그 생맥주를 꼭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포틀랜드 다운타운에 있는 로그 브루펍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요란스럽지 않았다. 머그나 후드티를 파는 작은 기념품 코너를 제외하면 오히려 허름한 동네 바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났다. 안주와 식사의 중간쯤 되는 음식도 팔았지만, 이미 저녁도 먹었고 그전에 다른 브루어리 한 군데를 다녀온 지라 간단하게 비어 플라이트로 로그 입성을 기념했다. 트렌드에 맞게 IPA가 메뉴판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IPA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플라이트에 포함시킬 네 종류의 맥주를 어렵지 않게 고를 수 있었다.
강 건너에 있는 또 다른 로그 브루펍은 오히려 더 복작거렸다. 근처 라멘집에서 40분이라는 대기 시간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선음주 후식사를 계획한 나는 로그 브루펍으로 털레털레 걸어가서 계절 한정 크리스마스 스타우트를 마셨지만 사실 맛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40분이었던 대기시간이 내가 맥주 한 모금을 마시자마자 "지금 당장"으로 바뀌는 바람에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왔기 때문이다. 매번 그렇듯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다음을 기약했다.
로그가 전통적인 맥주의 틀을 벗어난 이단아 같은 존재여서 일까, 로그 브루펍은 평가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포틀랜드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브루어리/브루펍은 데슈트(Deschutes)와 케스케이드(Cascade)다. 케스케이드는 사워 비어로 유명한 브루어리인데, 처음 포틀랜드에 갔을 때만 해도 나는 포터나 스타우트같이 진하고 고소한 맥주에 더 빠져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았다. IPA가 유명한 데슈트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방문이었던 추수감사절, 그 무렵 새콤한 맥주에 빠진 남편의 손에 이끌려 별 기대 없이 케스케이드로 향했는데 웬걸, 내 입맛에도 너무 잘 맞는 게 아닌가. 맛만 보고 나간다던 내 앞엔 깔끔하게 비워진 맥주잔 두 개가 놓여있었다.
비가 쉴 새 없이 내리던 다음날 오후에 찾아간 데슈트에는 어마어마한 행렬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비를 피하는 인파인지 아니면 데슈트가 항상 이렇게 붐비는 곳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 이후로 다시 간 적이 없으니까. 내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맥주를 만드는 곳이어서 그렇다. 우습게도 데슈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메뉴는 브라우니다. 맥주 캐러멜이 흩뿌려진 달콤한 브라우니가 비에 젖어 축 쳐져있던 내 기분을 회복시키는데 큰 일조를 한 덕이다. 내가 IPA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땐 뭘 몰랐지” 라며 데슈트에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포틀랜드행 비행기를 타면 “이번엔 또 어떤 브루어리에 가볼까”하는 마음에 매번 설렌다. 좋아하는 곳에 돌아가도 기쁘고, 마음에 드는 곳을 새로 발견하게 되면 더욱 기쁘다. 아직 개척해야 할 미지의 브루어리가 한가득이라는 점, 그래서 앞으로 마주칠 소확행이 한참이나 많이 남았다는 점이 나를 더 들뜨게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