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벡(Malbec) 와인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말벡 포도는 원래 프랑스 보르도에서 재배되던 품종이었대요. 하지만 까베르네 쇼비뇽이나 메를로에 비해 말벡의 인기는 바닥이었고, 다른 와인을 만들 때만 섞어 쓰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850년대에 이 말벡이 아르헨티나에 심어지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남미의 뜨거운 태양, 비옥하고 힘 있는 땅은 말벡의 잠재력을 200% 끌어냈죠. 프랑스에선 항상 초라한 조연이었던 말벡은, 진하고 선명한 붉은 빛과 풍부한 탄닌으로 지금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와인이 되었습니다.
당장은 인정받지 못해도 어딘가 제게 맞는 곳이 있을 거란 이야기는 위로가 돼요.
첫 직장에서는 주니어 시절을 회사의 전성기와 함께했습니다.
제가 발의하는 아이디어, 저의 기획안을 팀장님도 실장님도 모두 좋아해 주셨어요. 본부장님과 사장님 칭찬까지 받고 신뢰를 얻으니, 컨펌을 받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에블린은 한 번 주어진 목표는 어떻게든 끝까지 해내'라는 피드백을 받았고, 진급할 땐 기본급이 20% 가까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인정 욕구가 풀 충전되었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카카오페이로 생애 첫 이직 후 저는 대차게 소프트랜딩에 실패합니다.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제가 스타 플레이어여서가 아니라 최고의 팀 덕분이란 걸 알게 됐어요. 기존의 네트워크와 신뢰를 모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시스템과 프로세스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천지였죠. 와중에 벌어진 카카오페이 먹튀 사건이 애사심을 더 갉아 먹었습니다.
동기부여가 잘되지 않으니, 업무의 완성도가 떨어졌어요.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팀장님께 신뢰를 얻지 못해 꾸준히 한 서비스, 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 일에 스페어타이어처럼 쓰여지게 됐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혼란이 왔어요. '어, 이상하다? 그동안은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어왔는데?'
카카오페이는 저의 강점과 잘 맞는 환경이 아니란 생각에 여러 소개팅 같았던 면접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브런치에 후기를 남긴 대로, 결론적으로 저는 말벡 포도처럼 신대륙으로 떠나진 못했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계속 버텼더니 제가 발 디딘 곳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