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도 없고 마음 둘 곳도 없이 회사에서의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옆자리에 육아휴직을 막 마치고 복직하신 분이 새로 오셨어요.
저는 이미 의욕을 다 잃고 매너리즘에 빠진 상태였는데,
그분은 어떻게 육아를 병행하시면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기획을 맡으면 한 번 더 생각하고, 더 좋은 안을 만들기 위해 주변 동료들의 의견을 자꾸 물어보고, 심지어 프로젝트가 끝나면 사비로 상장과 기념품을 준비해 협업하신 분들께 선물하시기도 했어요.
처음엔 신기했어요. 각자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인데 선물까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이분의 '고맙다, 고생했다'라는 인사가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그 마음을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요.
일할 때는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고,
술자리에선 너무 웃겨서 회식이 좋아질 정도였어요.
그러다 2024년에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중요한 서비스의 마케팅을 맡게 된 거예요.
카카오페이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서비스 중 하나였지만, 사실 마케터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 있는 업무는 아니었습니다. 실적 압박이 상당하고, 문화나 일하는 방식도 마케팅본부와는 좀 다른 조직으로 팀 이동을 해야 했거든요.
기존 담당자가 모두 육아휴직을 떠나 제가 대체자로 보내진 것이었는데,
팀장님 입장에서는 팀에서 방출(?)해도 타격이 덜한 사람을 고르신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팀장님께 서운한 감정보다는 한번 정해진 인상이 참 바꾸기 어렵단 생각이 들었어요.
팀장님께서는 미안해하시며 저에게 2가지 선택지를 주셨습니다.
1. 3개월만 이 서비스를 맡고 대체자가 채용되면 원래 팀으로 돌아온다
2. 휴직자가 복직할 때까지 최소 1년 이상 이 서비스를 맡되 아예 신규 팀으로 이동한다.
그전까지 저의 가장 큰 갈증은 연속성 없이 그때그때 탑다운으로 내려오는 업무를 맡는 것이었어요. 한 서비스, 한 종류의 KPI를 꾸준히 가져가야 데이터도 뜯어보고 오너십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커리어의 깊이감을 만들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렇지만 당장 실적 방어를 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습니다.
동태 눈으로 지낸 세월이 길었는데 제가 다시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처음 해보는 일이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저는 그래도 새로운 팀을 선택했습니다.
드디어 하나의 서비스를 깊이 있게 팔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새로운 팀의 팀장님이 바로 제 옆자리의 에너지 퀸이셨거든요.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팀은 계속 사람이 모자랐습니다.
에너지 퀸은 매니징과 실무를 동시에 하며 육퇴하고 밤에 다시 일하시는 날이 많았어요.
그러면서도 작은 성과는 크게 칭찬해 주셨고, 상황이 어려울 땐 본인이 서포트해 주실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함께 고민해 주셨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업무 지시를 하신 적 없고, 의사결정마다 어떤 배경이 있는지 설명해 주셨어요. 필요하다면 불편한 대화나 질문도 피하지 않으셨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잘 해내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팀원들을 생각하는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에너지 퀸의 에너지를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 제 몫의 숫자를 책임지는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우리 팀이 모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애덤 그랜트의 책 <Give and Take>를 보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권력, 권위에서 비롯되는 지배력이고 다른 하나는 존중, 존경이라고 해요.
에너지 퀸이 어떤 타입의 리더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명확한 목표와 저를 믿어주시는 리더를 만나니
남미에 도착한 말벡 포도처럼 회사 내 저의 평판도 달라졌어요.
저는 이제 어려움이 있어도 존중하며 버티는 힘이 생겼습니다.
버티면 결국엔 저에게 맞는 때가 온다는 걸 알아요.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존중하며 버티고 계신다면, 언젠가 여러분도 여러분의 때가 올 거란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