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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Mar 09. 2017

J에 관하여

철학에 관하여

 나이 20세, 경상남도 진주시 출신. 나와 중학교 동창. 진주 중학교에서 경남 과학 고등학교로, 포항 공대로 진학한 나름 엘리트. 약간 비실비실하게 생김. 오타쿠. 생긴 것과 다르게 헬스 매니아. 중2병 환자. 모순 덩어리. 조주 기능사. 근성의 의지박약. 김지윤의 정말로 절친한 친구.

 J는 내 절친한 친구다. 오늘은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먼저 J에 대해서 소개하자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멋진 녀석이다. J라는 존재는 정말 그 자신의 꿈을 빼면 시체와도 다름없는 존재인데, 그 꿈이 바로 우리 둘을 아주 절친한 사이로 맺어준 동기이다. J와 나는 중학교 동창이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J와 나는 데면 데면한 사이였다. 우리 둘이 친해지게 된 것은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러니까 그 친구가 과고로 떠나기 전이다. 그는 내 블로그에서 내가 쓴 글들, 시나 생각을 정리한 글 따위들을 보며 내가 몹시 재밌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먼저 연락했다. J는 내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J 자신을 도와주면 자기도 내 꿈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그런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J의 그 자신만만하고 조금은 중2병스러운 태도가 나를 매료시켰다. 나 역시 그가 몹시 재밌는 녀석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기꺼이 돕겠다고 말했다. 그 뒤로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금처럼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J의 꿈에 대해서 말하자면. J의 꿈은 평생을 함께할 자신의 이상적인 반려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는 이 자신의 반려자를 자신만의 용어로 “Legna (레그나)”라고 칭한다. 영단어 Angel을 아나그램 한 것이다.  뭐, 그가 이 용어에 관해서 장황하게 연설한 내용이 있지만 굳이 여기서 지면을 할애할 이유는 못 느낀다. 다만 그의 꿈이 이러하고 이 꿈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하고 있다는 정도만 말하면 족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한의 극기”이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영원히 살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자신의 반려자를 찾고, 그를 지키고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유치하다고 볼 수 있는 그런 꿈이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의 태도는 정말로 진실되다. 나는 필시 그의 그런 진실된 태도에 매료된 것일테다. 아니면 그가 약속한 미래, 내 꿈이 이루어진 미래라는 말에서 마치 내 자신이 어느 소설 속 주인공, 혹은 그 주인공의 최측근 정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와 함께하겠노라고 한 것일테다. 아니면 그냥 나도 중2병 환자였겠지. 지금은? 솔직히 지금도 내가 떳떳하게 그렇지 않다고는 말 못하겠다.
 어쨌든 우리는 친해졌다. 그의 꿈과 생각, 열정적인 태도는 내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나는 늘 그를 동경했다. J가 가지고 있는 원대하고 비현실적인 꿈이 멋있다고 생각했고(지금도 물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 자신만의 방법도 구축해놓았고, 또한 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래서 그런 꿈을 꾸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는 내게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준 것이다. 물론 나도 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웃기게도, 나는 J와 거의 정 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먼저 J의 경우 그는 오직 단 하나의 꿈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때문에 그의 가치관은 일종의 흑백 논리에 가깝다. 자신의 꿈이 옳다는 대전제, 진리를 깔고 들어가며 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몹시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때까지 내가 본 누구 중에서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구축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철학은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라는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치환할 수 있으며, 어떤 논리에도 우선하는 자신의 가치에 따라 세계관이 구축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반려자, 레그나(LegNa)이며 (비록 아직 나타나진 않았지만) 그 밑에는 자신과 함께 꿈꾸는 몇 명의 친구들,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나머지 세상을 구성하는 객관화된 타자들이 있다. 그의 세계는 오직 흑백의 모노톤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 우선순위로 설명하자면 그의 생각은 모두 레그나로 귀결된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설파함에 있어서 늘 주변인들과 마찰을 빚어낸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못한 가치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허나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나의 세상은 모노톤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그레이스케일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나는 그의 가슴 뜨거운 꿈, 그 맹목적인 주행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누구보다 그의 생각에 깊게 공감하지만 또한 누구보다 그에게 많은 반박을 가하는 사람이기도 한다. 즉, 나는 그에게 비판을 가함으로써 영향을 끼친다. 그와는 정 반대인 나의 꿈과 가치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이를 위해서는 도덕이 다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를 위해 가장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하고, 그 과정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반석이 되리라고 믿는다. J와 나는 따지고 보면 라이벌이다. J에게는 도덕 같은 것은 거슬린다면 치워버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아주 치열한 라이벌 관계이다. 그가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다. “너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정말 싫은 게,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벅찬데 어떻게 너희는 모두를 사랑하려 하는 건가.” 그 말에는 정말로 솔직한 고백과 동시에 스스로의 한계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틀렸다고는 또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질투가 담겨있다.  나는 J에게 일종의 무게추로서 기능한다. 그를 견제하고 너무 극단으로 쏠리지 않게 잡아주는. 나로 인해 J는 조금 더 열린 시각을 어쩔수 없이 가지게 되며, 비록 그 고집은 꺾이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길 원한다.
 J의 생각이나 꿈에 대해선 정말로 할 말이 많다. 나는 이를 몹시 매력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J와 나는 가치관에 있어서는 정 반대의 사람이다. 서로간에 합의된 부분은 오로지 꿈을 추구하는 인생이 가치 있다는 정도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를 이해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는 내 가장 절친한 친구고, 내게 자신의 가장 많은 부분을 보여준 친구다. 때문에 서로 힘든 일이나 고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서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다. 또한 나는 왜 그가 그런 꿈을 꾸는지와 관련된 배경을 알고 있으며, 그럴 수 밖에 없는 존재인 J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자세히 안다. 그의 꿈은 모순 덩어리이다. 철저한 무논리이자 모순이다. 그러나 이를 추구하는 J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리고 내심 속으로, 나는 불나방이 스스로 몸에 끼얹은 불을 견뎌내면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와 같이 꿈을 꾸는 사람이 되기로 했고, 그의 모든 이야기를 믿음의 영역에서 굳건히 믿어주기로 했다. 나 역시 J와 비슷한 류의 사람인 것 같다. 사소한 것을 신념화 하는 모습이 말이다.
 이렇게 쓰니 J가 몹시 대단한 사람 같은데, 사실 J는 굉장히 푼수다. 아직까지 이룬 것이라곤 그 개똥같은 철학을 정립한 것과 곁에 같이 꿈을 꿀 친구를 마련한 것 뿐,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기지 못해 – 다시 말해 극한의 극기를 추구하지 못해 – 늘 괴로워한다. 그는 괴물 그 자체이다. 머리로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이 떠 있는 꿈을 꾸면서, 몸은 바닥에 밀착하여 편히 쉬고 싶어 한다. 또 그러면서도 자신처럼 꿈 꿀 수 없는 사람과는 섞이지 못한다. 그리고 대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저 그의 생각을 비웃는다. 섞이지 못한다. 허풍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그는 그 괴리에서 오는 고통을 절대로 피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화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마주한다. 당당하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는 대체로 실패해왔으나, 자신의 몸을 언젠가는 띄우리라고 기대한다. 그렇게 믿기에 나는 기꺼이 이 믿음직하지 못한 놈을 믿기로 했고, 지금도 같이 꿈을 꾸고 있다. 그의 철학이나 가치관 따위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나는 J를 믿는 것이지 J의 꿈을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음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목적의식 없이 살아가던 내게 그의 모습은 하나의 신화와도 같았다. 열정과 노력의 미학. 백번을 꺾여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믿음. 사실 이런 미덕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많다. 흔히들 성공한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J의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마 무엇보다 J가 내 친구이기 때문일 터이다. 늘 곁에 있으며(심리적으로) 자신의 꿈과 생각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자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언제까지나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늘 동기부여된 상태로 지낼 수 있다.
 나는 나와 J의 관계를 이상적인 친구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그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부끄럼이 없다. 비록 내용이 조금 유치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운이다. 요즘과 같이 진정한 소통에 목마른 시대에, 누구하나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부 털어 놓을 수 있다는 것. J와 나 서로는 그래서 서로에게 소중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없었다면 삐뚫어진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 글을 그에게 헌정하는 바이다. 덕분에 행복할 수 있다고.






















J에 관하여, 친구에 관하여

 최근에, 드디어 군대간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다. 허겁지겁 뜯은 편지 봉투에서 눈물나게 낯익은 글씨체가 나타났다. 조금은 코끝이 찡했다. 부끄럽게도. 우습게도 편지봉투는 풀이 아니라 실로 봉해져 있었다. 친구 말로는 풀이 없어서 바늘로 꼬멧다고 한다. 심지어 내 주소도 몰라서, 어머니꼐 부탁을 드려 간신히 편지를 보냈다. 포항에서 진주로, 다시 서울로 온 편지는 거의 3주일 가까이 여행을 한 셈이다. 참, 여기 저기서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편지이다. 겉에는 친구 어머니의 글씨가, 안에는 친구의 글씨가. 늘 친구가 자랑하듯 둘의 글씨는놀랍도록 닮아있었다. 친구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라는 말을 반복해서 적어뒀다. 그는 내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그렇게 날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글을 도저히 완결 지을 수가 없었다. 몇 번째 글을 지우고 다시 쓰는 지 모르겠다. 친구의 온기가 묻은 글은 좀처럼 내 맘대로 바뀌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전후로 내게는 너무나도 큰 심적 변화가 있었다. 그래, 군대가 뭐 대수로운 거냐 라고 말하며 친구는 군대에 갔지만, 나는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고 그럴 때 필요한 친구는 곁에 없다. 우울하다. 바쁘다. 피곤하다. 덩달아 공허하다. 당분간은, 친구가 입대하던 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송두리째 글을 다시 쓰기로 했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내 나름대로 친구에게 충실하는 방법이니.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싶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나는 이 표현을 애증한다. 인간의 99%를 설명해주지만 1%는 설명해주지 못 하기 때문이다. 늘 그렇다. 좋은 친구도 마찬가지다. 90%이상은 공유하지만 10%는 공유할 수 없는 사이. 1%건 10%건 사람들 사이에는 늘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흉금없이 지내는 사이라고 해도.
 그치만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비밀의 양 따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필연적이라면 문제시 되는 부분은 태도이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진실되기란 어렵다. 좋은 친구는 늘 진실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J는 언제나 내게 최고의 친구이다.
 그는 늘 내게 충실하다. 아니 충실하다라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J의 태도는 ’Sincerity’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닮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애매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J와 나는 중학교 때 만나서 고등학교 때 친해졌다. 도대체 왜인지는 이제 우리 둘 다 기억하지 못 하지만, 그는 나를 인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늘 그렇듯, 그 녀석은 수단적이다. 그래서 그는 나와 친해지고 싶다고, 자신의 뜻을 내개 내비쳤다. 동시에 그가 내게 보일 수 있는 가장 슬픈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 꿈과 함께. 그러니까 그게 그에게서 몇 퍼센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그는 당시 이 지구상에 어떤 사람보다 내게 진실된 사람이었으니. 나는 J라는 친구에게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꿈에 의해서든, 혹은 그의 태도에 의해서든.
 그리고 꿈에 관해서라면, J는 꿈에 일가견에 있는 사람이다. J는 자신이 추구하는 그 꿈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남들이 유치하고 허황되었다고, 자존심 과잉이라고 욕하는 너덜너덜한 꿈 하나를 붙잡고 살아간다. 이상적인 반려자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 그래도 정말 간신히 지켜올 수 있었던 꿈이다. 얼마 안 되는 삶에 깃든 불운의 멍에들이여. 그가 겪은 사적인 불운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 할 순 없다. 그건 J가 내게 보여준 신뢰에 대한 모독이므로. 다만 그의 삶에 그가 꾸는 꿈은 필연적이었다고, 옆에서 지켜 본 친구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하고 싶다. 만화 ‘송곳’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서는 데가 바뀌면 픙경도 달라지는 거야.’ 한결같이, 라는 말은 얼마나 어려운지. J는 그럼에도 늘 한결같다. 그런 J의 모습은 언제나 내게 귀감이 된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J를 동경했다. 처음엔 단순히 공부를 잘해서, 다음엔 그의 꿈과 열정 때문에. 나를 J처럼 꿈꾸게 만든 것도 그의 꿈 덕분이며 어디가서 부끄럽지 않게 내 꿈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태도도 그에게서 배운 것이다. 거기다 자신의 꿈에 대해서라면 거의 숭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 열정을 보여준다. 누구 하나 공감해주지 않던 꿈을 붙잡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목적의식 없이 살아가던 내게 그의 모습은 하나의 신화와도 같았다. 열정과 노력의 미학.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언제까지나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늘 동기부여된 상태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불안하다. 그 꿈에 매몰되어 J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또 늘 극단적인 그의 생각들. 방법에 있어서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모습도 불안하다. 그렇다고 그가 몹시 몰인정하고 도덕적으로 결여된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꿈에 정말로 진지하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수많은 무논리와 모순을 모두 짊어지고, 불나방처럼 불길로 뛰어드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나는 내심 속으로, 불나방이 스스로 몸에 끼얹은 불을 견뎌내면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와 같이 꿈을 꾸는 사람이 되기로 했고, 그의 모든 이야기를 믿음의 영역에서 굳건히 믿어주기로 했다. 나 역시 J와 비슷한 류의 사람인 것 같다. 사소한 것을 신념화 하는 모습이 말이다.
 거기에 더불어 J와 나는 정말로 말이 잘 통하는 사이다. 가치관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하나 꿈을 가슴에 품고 지낸 다는 것? 신념이 있다는 것? 의외로 우린 정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한다. 그게 왜 그런지는 명확히 설명하지 못 하겠다. 아마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나, 개인적 특질 따위가 영향을 줬을테지. 확실한 건 이 소통의 부재의 시대에 말이 잘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서로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오해할 일도 없는. 음, 어쩌면 서로 다양한 기억과 생각, 논쟁 등을 공유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더 인용을 하자면,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에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모티브가 계속해서 반복 등장한다. 아마 개인의 자아 형성이 타인과 교류하며 형성되는, 인간의 사회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마 나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 중 높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 J일 것이다. 뭐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니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는 걸수도 있겠다.
 서로간에 절친한 사이답게,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를 미래에 고민하고 꿈꿀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늘 목적 없이 살던 내게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친구다. 구름 너머의 햇살!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나는 그가 현실 감각을 잃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치 무게추처럼. 늘 극단적인 그 친구가 너무 앞서가지 않도록. 빨간 알약! 또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뭐, 그렇다고 늘 순순히 따라오는 녀석은 아니지만. J는 좋은 친구다. 태도나 내게 가르쳐준 꿈과 열정, 지음, 바늘과 실. 어쩌면 이런 것도 운명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J는 극단적일 때가 많아서 불안하다. 극한의 극기!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삶의 태도다. 쉬운 길이 있어도 늘 험한 길을 선택하고,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주의. 난 그의 그런 도전적 태도가 그를 파멸하게 만들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그는 가끔 부주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종종 나는 이런 친구관계가 필연적임을 느낀다. 하늘은 J를 만들고… 불안하셔서 김지윤도 만들었다!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J가 필요하다. 친구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어떠한 관계에서든 일방적인 관계는 위험하다. 부모님을 달리 위대하다고 하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최대한 양보해서 표현하자면, 상호 시혜적 관계라는 표현이 그나마 적절할 것이다. 내가 J를 좋은 친구라고 함은 서로 필요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즉 성숙도가 높은 관계이다. J와 나 서로는 그래서 서로에게 소중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없었다면 삐뚫어진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J는 그의 극단성으로 인해서, 나는 나의 나태함으로 인해서. 그래서 늘 고맙다. 그 때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줘서.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해줘서.
 이렇게 쓰니 J가 몹시 대단한 사람 같은데, 사실 J는 굉장히 푼수다. 아직까지 이룬 것이라곤 그 개똥같은 철학을 정립한 것과 곁에 같이 꿈을 꿀 친구를 마련한 것 뿐,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자주 일상에서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게 되어 괴로워한다. 머리로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이 떠 있는 꿈을 꾸면서, 몸은 바닥에 밀착하여 편히 쉬고 싶어 한다. 다만 그는 그 괴리에서 오는 고통을 절대로 피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화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마주한다. 적어도 꿈에는 항상 진실하다. 늘 당당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가 그의 꿈을 이루리라 믿는다. 그렇게 믿기에 나는 기꺼이 이 믿음직하지 못한 놈을 믿기로 했고, 지금도 같이 꿈을 꾸고 있다. 다만 나는 J를 믿는 것이지 J의 꿈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꿈을 J가 꾸기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늘 고맙다. 친구란 존재는 참 대단한 것 같다. 어쩌면 J와 나의 관계가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좋은 친구는 확실히 좋은 삶의 보편적 기준으로써 작용한다. 지금까지 나는 내 나름대로 J와 나의 관계를 반추해보며 좋은 친구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을 풀어 놓았다. 조건은 다양하다. 그리고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확실한 점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친구의 존재는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새벽 늦은 시간 까지 계속해서 글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 소중한 감정의 깊이였다. 우정. 쉽게 입에 담지 않는 단어다. 어쩐지 말하기 조금은 쑥스러운 단어이기도 하고. 또 별로 말할 기회가 없기도 하고. 그리고 조금은 조심스러워지는 단어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이 복잡하다. 하고 싶은 말도 정말 많고. 아마 무엇보다 내면에는 내 이런 우정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단순히 논리만으로는 설명 불가능 하듯, 우정 역시 마찬가지일테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앞에서 계속해서 설명하려고 시도 했지만 아직 1% 모자란 느낌이다. 정말 운명 같은게 있는게 아닐까, 또 우스운 소리를 한다. 그래, 최소한 인연 정도는 되겠지. 그 정도에서 생각을 정리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은 우연의 연속이 아닌가. 그 속에서 수 십 수 천개의 인연이 피어나는데, 그 중에서 하나 정도는 이럴 수도 있지. 비록 나와 J의 만남은 J의 사심, 내가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과정은 전혀 수단적이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래도 J 정도면 꿈과 우정 사이에서 하나 선택 하라면 꿈을 선택할 녀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거라고 믿는다. 편지에 적혀 있던 구절 하나가 계속 머리속을 멤돈다. “… 막상 쓰라고 쥐어진 편지지를 보니 보고싶고, 보지 않아도 의지가 되는 구나.” 나로서는 J 하나로도 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J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친구는 소중하다. J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늘 그에게 진실하기를 다짐한다. 지금의 이 소중한 감정을 가지고 쭉 살고 싶다. 그리고 모두에게 좋은 친구가 있기를, 좋은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렇게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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