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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Sep 03. 2018

낡은 이유

대체 왜 글을 쓰니?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근 1년 동안 글쓰기의 결핍에 시달려왔다. 글쓰기가 무엇이기에 나를 그토록 목마르게 했을까? 이런 주제로 몇 번이고 나는 글을 썼다. 다시고 열심히 글을 써보자고. 때때로 게임을 지우거나 학업을 중단하면서, 나는 그런 글을 쓰곤 했다. 우스운 일이다. 글을 쓰겠다는 글만을 쓰고, 나는 늘 그랬듯이 내 안으로 침전했다. 다짐은 쉽다. 실천은 어렵다. 나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럼에도 나는 늘 연어처럼 또 돌아와서, 먹히지 않을 다짐을 다시고 하는 것이다. 참 재밌는 일이다. 왜 그럴까? 그냥 포기해버리면 편할텐데. 나는 무얼 바라서 그렇게도 글을 쓰려고 했을까. 글을 쓰려고 폼을 잡았을까.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났을까. 글을 쓰는 친구를 가까이 두었을까?


옛날로 돌아가보면,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창작에 있다. 내 유년기는 정말 보잘 것 없고, 재미없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를 구원해준 것은 글이었다. 그것이 소설이든, 학습서든, 나는 늘 글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가 새벽같이 책을 읽었고, 어머니는 나로부터 책을 때어내야 했다. 다른 친구들이 공룡 같은 것들을 좋아할 때, 나는 책을 좋아했다. 나의 가장 오래되고 사랑하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서면 맡을 수 있는 특유의 서늘한 책 냄새였다. 나는 책을 좋아했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나서, 나는 글을 쓰고 싶어했다. 글을 쓴다라. 나는 공책에 얼토당토 않은 소설을 지껄였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잉크 타입 펜을 사서, 글을 휘갈겼다. 수업 시간에 글을 쓰다 선생님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친구와 쓴 것을 나누어보기도 했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보잘 것 없는 글에 달리는 보잘 것 없는 댓글들. 그러다가 종종 비판에 얻어맞고 눈물을 질질 흘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중학교 시절에 겪었다. 여전히 나는 글에 목말라 있었다. 짧은 체력과 촉박한 시간, 온갖 유혹 속에서 나는 언제고 글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글에 목말라했다. 재밌는 일이다.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파면 되는데, 글에 결핍을 느끼면 글을 쓰면 되는데, 쓰지도 않으면서 결핍을 느낀다니! 참으로 기만적이다. 그랬다 나는 아무튼. 어쨌거나 나는 글쓰기에 집착했다. 블로그도 했고, 카페도 했고, 다술? 이제 기억도 안 나는 문피아 하위 사이트에도 가입을 했었다.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 내 글을 읽히게 만들기 위해서. 입에 발린 몇 가지 칭찬들을 수집하고, 나는 구름 위를 거닐었다. 아직도 그 시절에 쓰던 글들이 생생하다. 주인공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민하던 순간들, 글에 존재하는 구멍을 메꾸기 위해 과학을 공부하던 때. 매체로부터 얻은 일차원적인 연성을 가공해 글로 만들고자 했던 그 작고 하찮지만, 순수했던 열정들. 그래 그래.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이 어떤 개연성을 내게 부여해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토록 글에 집착하는 이유를, "패션"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해주진 않는다. 지난 1년간 글을 쓰지 않고 건강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글을 쓸 수 없어서 건강하지 못하다? 글쎄. 건겅하지 못해서 글을 못 쓴 것에 가까운 순간들이었는데. 하찮은 집중력과 아이디어를 그러모아 만든 것들에도 만족했으면서, 나는 무얼 바라왔던 걸까? 그런 부재들, 잃어버린 조각들이 있다. 


그래서 왜 글을 쓰는데? 왜 그렇게 글에 목을 메는데, 구원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서? 글쎄. 글쎄! 이제 생각해보면 글쓰기는 내게 자아 실현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도 굉장히 키치하고, 형식적인. 분위기와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서 능동적으로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또 도구는 엄청 가려서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게 아니면 자기 생각 하나 주체하지 못해서, 제 발에 걸려 비틀거리는 글을 쓰고, 하는 얘기라곤 우울하고 질척한 것 밖에 없는데. 그게 내 자아 실현이라고? 아쉽게도 그게 나인 것 같다. 내가 쓰는 글은 누구보다도 나를 닮아있다. 누가 자신의 글이 나의 글과 닮았다고 한 적 있다. 글쎄, 우리가 닮은 게 아닐까. 내 글이 당신 글을 닮은 것보다 우리는 서로를 더 닮아 있었겠지. 파편화된 언어와, 외주 맡긴 주체와, 타인에게 기생하는 사고가 모여 만든 내 글이 나를 닮았다니, 진짜 웃기다. 그런데 그게 내 존재일 것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없다고, 개인은 소중하다고, 개성은 소중하다고. 그렇지만 나는 토사물이나 누더기에 가깝다. "패션"이다. 내가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얼마나 있을까? 그 중에 다른 글보다 뛰어난 것은 몇이나 있을까? 데이터의 낭비다. 전기의 낭비다.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 글 밖에서 형체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사람을 아무리 현혹하고, 까마귀처럼 예쁜 사람들을 곁에 두더라도, 나는 글 밖에서 숨쉴 수 없는 물고기인 것이다. 그게 무슨 시궁창이든, 하수구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면 글쓰기가 나의 업인가? 글쎄. 


나는 그저 나를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글쓰기 말고 이외의 것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말은 더듬고, 동향 사람이 아닌 이상 이해하기 힘든 서부 경남 악센트와 성조가 강하고, 다른 사람이 두 어 단어를 뱉을 때 여섯 단어를 뱉는, 숨막히는 화법을 구사하고. 감정을 표현할 때는 강조를 위해서 인상을 쓰고, 표정 관리를 못하고. 자기 방어적인 제스쳐를 취하고. 말로 타인을 속일 순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에 관해서 얘기할 때, 손톱 아래의 무른 살처럼, 벌건 벌거숭이가 된다. 나를 그냥 거칠게 내보이는 것 이외에 무얼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났다. 나를 걸렀다. 그럴만하지. 그럼 다른 건 할 수 있니? 춤? 음악? 그림? 글쎄. 창조? 아니. 반쯤 소화된 덩어리들을 엮는 것 말고, 네 진짜 이야기를 말야. 아니.


 결국 내가 꾸며낼 수 있는 건 글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목숨 거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목숨을 걸진 않으니까. 집착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를 안아 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이런 나라도 괜찮냐고, 적당히 검열해서 드러내보일 수 있는게 글 밖에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미워해. 그래도 나를 사랑해줘. 글이 아니면 예쁘게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지 못하니까. 나를 소비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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