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윤 Jan 29. 2019

첫 번째 유형

단편 소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소모적인 관계. 누구 하나가 갉아 먹히는 관계. 푸른 잎사귀를 쏠아버려 듬성듬성 보기 흉하게 만들어버리는 관계. 어느 하나는 나쁜 인간이 되고, 어느 하나는 피해자가 되는 관계. 혹은 둘 다인 관계. 생채기를 내는 관계. 떨어지는 자석 같은 관계. 사금파리 머금은 연줄 같은 관계. 디지털 시계와 아날로그 시계의 관계. 설거지를 하고 아기를 키우고 어쩌다가 아이스크림에 위스키를 부어 마시는 관계. 끊은 담배 냄새를 맡으면 기억나는 관계. 끝이 없는, 관계.


----------


비가 내렸다. 바위는 비를 맞았다. 비가 바위에 스며들었다. 


안녕,

안녕.


비가 그쳤다. 해가 떴다. 느리든 빠르든, 물방울은 바위를 떠난다.


다음에 또 봐.

그래.


몇 년이 지나고, 어쩌면 몇 세기가 지나면 둘은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흐르고 또 흘러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고

들어가고 나오고.


안녕, 나 기억해?

아마도. 

조금 서운한 걸. 

그러면 둘은 밤새도록 조잘조잘 떠들겠지. 최소한, 물방울은 말이 많으니까. 본 게 많으니까.

바위는 꼼짝않고 잘 들어주니까. 

그리고 마침내 비가 그치고, 또다시 해가 뜰 것이다.


이번에도 안녕.

그래.


또 몇 세기가 가고, 그런 우연이 몇 번 반복된다면.

만 년이 지나고 또 만 년이 지나면.

바위는 움푹 파이고, 또 제법 속이 깊어져서 바쁘겠지.

그러면 바위는 물방울을 기다리겠지, 그런 와중에도.


안녕

오랜만이야.


바위는 알고 있지. 속이 깊어진다는 건, 그만큼 금도 깊다는 것이라고.

그래도 둘은 반갑게 인사할 것이다.


그러다 만 번째 만 년쯤에 바위가 부서졌다.

우연히 바위는 부서졌다.

자글자글한 것들이 쓸려 내려가고,

조금은 몽롱해진 채로

바위는 또 기다리겠지.

녹아서 물이 될 때까지.


----------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어쨌거나 부서지는 것이 있고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다. 혹은 부서지는 것처럼, 부서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결국 돌아와서 각자는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르겠다. 금 간 자리에는 물이 스며들고, 가끔은 그것이 얼기도 하고. 그래서 바위가 갈라진다면 바위는 침묵할 것이다. 바위니까. 물은 그래도 다시 하늘로 돌아갈 것이다. 물이니까. 첫 번째 유형

작가의 이전글 낡은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