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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Oct 03. 2020

머리카락은 강철보다 질기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강철보다 질기다고 한다.

추석을 맞이해 나는 집을 왕창 치우고 있다. 지난 시간들은 묵은 때가 되어 온 방안에 내려 앉아 있다. 더깨라는 사투리가 있다. 덮개에서 온 말일텐데, 종종 이렇게 내려 앉은 것들, 지난 것들의 흔적이라는 의미로도 쓰이곤 한다. "역사의 더깨"처럼. 내 온 방안에 내려 앉아 있는 이 무형의 무언가에게 참 어울리는 이름이다. 더깨.

집을 치우기 위해서 청소기를 들었는데, 청소기 헤드가 있던 자리에 끈적한 흔적이 보였다. 아마 무언가 물기가 묻어서, 청소기 헤드의 먼지 흡착용 털들에 있던 때가 녹아 나온 것일 테다. 그래서 기왕 청소를 하는 김에 청소기 먼저 청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망상어 대가리 같이 새긴 청소기 헤드 안에는 빙빙 돌면서 먼지를 흡착하는 솔이 들어 있다. 그 솔과, 움직이지 않는 부분에 달린 솔이 다 때가 그득그득 들어 앉아 있으니 이래선 청소를 해도 사방에 때를 묻히고 다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누칠을 하자 누런 땟물이 흘러 나왔다. 빙빙 도는 솔은 실과 머리카락이 엉켜서 솔에 달린 털들이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손톱으로 끊었다. 어느 머리카락은 밝은 염색을 한 머리카락이고, 어느 머리카락은 굵고 길고, 어느 머리카락은 얇고 가느다랗다. 누구의 머리카락인지도 모를 머리카락들이 잔뜩 솔에 메여 있었다. 내가 이 솔을 마지막으로 청소한 게 작년 겨울이었을테니, 그 사이에 우리집을 다녀간 사람들의 머리카락이겠지. 그렇게 머리카락 컬렉션을 뜯어내어 바닥에 버리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히 지나간 시간들인데 이렇게도 생경하게 느껴지다니.

나는 아픈 이후로 가장 슬프고 싫은 점이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언제부터 아팠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파서 생활 전반에 큰 문제를 느끼고, 소진된다고 느끼던 때가 22살 때였으니까 아마 4년 전부터겠지. 그 때부터 나는 많은 기억들을 잃어버렸다. 기억이라는 것은 원래 선별적이겠지만, 좋은 것들을 그러 모으고 그 사이에 낀 쭉정이나 돌멩이들을 골라내는 일이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밥상 위에 쭉정이와 돌맹이가 가득한 밥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것을 한 입 크게 물고 입 안에서 빠드득 소리가 나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도. 그러고 그것을 우적우적 씹고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면 점순이가 깨빡을 친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랬다는 거겠지. 그래서 최근의 기억은 알맹이가 드물게 남아 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만 잔뜩 남겨놓고. 그래서 나는 그 머리카락들을 보면서, 지난 시간들을 몸서리치게 느끼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한 때 우리집 수챗구멍은 형형색색의 머리카락들로 가득했고, 세면도구통에는 주인 모를 칫솔들이 가득했다. 그 때가 좋았다고 하기에는 살아온 시간들이 흉맹한 형리처럼 버티고 서 있다. 나에겐 내일도, 어제도 위태위태 한 시간의 연속인 셈이다. 권태라기보다는, 생살 같은 시간들. 모이고 모여 내가 된 것들. 소름이 끼치고, 몸서리를 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양 팔을 감싸 안게 되는 그런 일들의 총집합.

나는 잠깐 청소기를 씻으려다가, 머리카락을 끊어 냈을 뿐인데.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 갔다. 머리카락은 여기 남아 있는데, 다른 것들은 어디갔는지 도저히 모르겠는 기분이 되었다. 쭉정이 밥그릇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강철보다 질기다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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