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시각에서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영화 '미스트'의 안개 속 장면이 자꾸 겹쳐 보인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경제는 어렵고, 언제 나아질지도 분명하지 않다.
고금리와 저성장, 산업 전환 같은 말은 반복되지만 체감되는 해법은 없다. 지금 한국은 분명 안개 속에 있다.
미스트에서 사람들은 안개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갈라진다. 이 구도는 한국 정치의 진보와 보수, 그리고 극단을 설명하는 데 꽤 잘 맞는다.
온건 진보에 가까운 선택은 위험을 알면서도 안개를 벗어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길이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한다. 실패 가능성도 인정하고 그 책임도 감수하려 한다. 한국 사회에서 구조 개혁이나 산업 전환, 적극적 대응을 말하는 목소리는 이 태도에 가깝다. 불안하지만 정체를 더 큰 위험으로 본다.
온건 보수는 다르다. 보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린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버티며, 검증되지 않은 변화는 경계한다. 지금의 고통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안정에 무게를 둔다.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불안을 관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문제는 극단이다. 극좌나 극우는 기다리지도, 나아가지도 않는다. 대신 안개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고통은 누군가의 잘못이고, 벌이며, 질서를 어긴 대가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그러면 현실을 바꿀 필요는 사라지고, 분노를 향할 대상만 남는다. 안개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 된다.
영화의 결말이 더 큰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개를 벗어나기 위해 나아간 선택, 즉 가장 책임감 있고 합리적으로 보였던 온건 진보적 선택은 결국 파멸로 끝난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고, 비겁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결과는 비극이었다. 그것은 옳아 보이는 선택이 항상 현실을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인간의 불안을 없애려 하지 말고 견디라고 했다. 불안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자유와 선택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미스트 속 비극은 불안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불안을 다루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해답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불안을 견디는 태도인 것 같다. 안개는 언젠가 걷힐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사회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버티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지금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보수든, 진보든 자기의 태도가 맞다는 확신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