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꼰대였다.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꼰대증후군
나는 한동안 스스로를 ‘꼰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왔다.
신세대 감수성을 이해하려 애쓰고, 시대 변화도 나름대로 잘 따라가고,
후배들에게 의도적으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편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의 밑바닥에서 꼰대스러움의 뿌리 같은 것이 자꾸 보여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꼰대스러움이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내 방식이 옳다’는 비합리적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누군가의 의견이 미숙해 보이거나,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알지도 못하는 감정이 먼저 튀어나온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 더 낫지 않을까?”
“내가 해본 대로 하면 될 텐데…”
이 말에는 사실 숨겨진 전제가 하나 있다.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전제가 바로 꼰대스러움의 씨앗이다.
웃기게도, 정답을 아는 줄 알았던 나조차
삶에서 매번 새로운 시행착오를 겪고,
오늘 맞는 말이 내일은 틀리기도 한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 앞에 서면 갑자기 ‘정답을 가진 사람’처럼 굴게 된다.
비합리적인 확신이 나를 꼰대로 만든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비합리성이 ‘조언’이라는 그럴듯한 외피를 쓴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면 힘들지 않을까?”
“내가 아는 방법이 있는데…”
입으로는 걱정과 배려를 말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상대의 선택보다 내 경험이 우월하다고 믿는 감정이 꿈틀댄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상대는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고
다른 배경, 다른 성향, 다른 속도로 성장해 왔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그 사람에게도 맞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 간극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의로 포장된 참견조차 결국 꼰대스러움이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기확신 편향(overconfidence bias)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실제보다 정확하다고 믿고,
그 기준을 타인에게도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미국 심리학자들의 연구에서도
“경험이 많을수록 조언할 때 과잉 확신이 커지고, 정작 조언의 정확도는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반복해서 보고된다.
이걸 보고 허탈한 웃음이 났다.
나는 경험이 많아서 조언하는 게 아니라, 경험 때문에 더 오만해졌던 것이다.
내가 꼰대스러웠던 이유는
상대가 내 기준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비합리적 기대 때문이었다.
“저 정도는 이해해야지.”
“그 나이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이건 내가 겪어본 방식이 더 효율적인데 왜 따라오지 않지?”
이 기대는 현실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규칙이다.
그리고 세상은 단 한 번도
내 기준대로 움직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기대를 내려놓지 못했고,
기대가 어긋날 때마다
상대가 아니라 내 감정이 먼저 흔들렸다.
그 감정의 요동이 결국 꼰대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한참을 돌아서야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합리성’은
결국 나의 기준이 아니라, 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현실은 이렇다.
사람은 각자의 속도로 배운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영역이 상대에게는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은 나에게만 최적화된 방식이다.
어떤 관계든 강요 없이 유지될 때 가장 편안하다.
이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불필요한 조언이 줄고,
간섭이 사라지고,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는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비로소 내 안의 꼰대스러움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꼰대스러움은
나이가 들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판단을 단순화하고 싶어 하는 비합리성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그리고 이 비합리성을 걷어내고 나니,
남은 건 단 하나의 사실이다.
“사람은 나와 다르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좀 더 편안해졌고,
상대도 나를 덜 부담스러워했다.
합리성은 결국 내 삶도, 관계도, 감정도 모두 한결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참, 그렇다고 내가 이제 꼰대스러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은 아니다.
이 합리성을 깨닫고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