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세상이 지옥인가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스스로를 지옥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이 세상은 지옥의 속성을 모두 담고 있다.
에덴에서 인간은 고통도 죽음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죄를 짓고 쫓겨난 그 순간부터 인간은 고통이 자연스러운 세계로 들어왔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땀 흘려야 겨우 먹고 산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출산의 고통이 주어진다.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형벌의 요소들이다.
고통, 분투, 불확실, 죽음.
이 네 가지가 일반적이고 당연한 세계라면 그 세계는 이미 지옥적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옥의 조건에 들어선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 어떤 고통을 만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카뮈는 세상을 “부조리”라고 불렀고, 사르트르는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태어나고, 원해도 영원히 살 수 없다.
사랑하면 잃을 수밖에 없고, 가진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이런 존재의 방식은 지옥의 고통보다 덜 극단적일지 몰라도 더 길고, 더 깊고, 더 피할 수 없다.
죽음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살아가는 과정’ 자체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초자연적 악마가 없어도 충분히 지옥이 된다.
왜냐하면 사회 구조 자체가 인간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특권을 갖고,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고통을 떠안는다.
인간이 만든 지옥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다.
아무리 발전해도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형벌.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더 많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는 고통이 반복된다.
드라마 <지옥>이 보여줬던 것처럼 사람은 ‘죄’보다 ‘낙인’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는다.
그 모든 고통이 평생 반복되는 세계라면 그곳을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에게 위안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죽어야 시작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고통은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이어진다.
피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하루하루가 형벌이고, 누군가에게는 삶 자체가 짐이다.
누군가에게는 세상이 버텨내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지옥이 따로 필요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이미 지옥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