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여름 | 런던맑음
12시간의 비행.
(비행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날아다니는 동굴에서 우리는 꼼짝없이 갇혀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먹고, 자고, 싸고, 다시 먹고. 그러다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가수면 상태로 이루어지는 명상의 시간을.
불안함과 피곤함이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비행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여행의 계획을 바로 이 명상의 시간에 세우곤 한다. 의외로 직관적이고 본능적이며 탁월한 계획이 세워지곤 한다. 단, 치명적 단점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대기업에서의 4년. 그것도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서나 이름만 대면 아는.
돌이켜보면 그 4년 동안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창하게 휴대폰 상품기획을 한다고 떠벌리기엔 그 속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 미약했고, 그래도 보람찼다고 회상하기엔 그 속보다 밖에서 즐거웠다.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월급은 생각없이 쓴 탓에 입금되자마자 카드값으로 빠져나갔고, 재주라고 끄적대던 글솜씨는 신용카드 서명란의 적는 글씨가 전부인 일상 속에서 퇴보해갔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갔고, 4년이 갔다. 그렇고 그런 삶의 무료함. 무료함에 지배된 일상은 무색무취하게 쥐 죽은 듯 흘러갔고, 정작 내가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뀐 걸 알게 된 건 교통카드의 리셋된 0원에서였다.
깨달음은 본능적이었다. 본능적인 위기감. 이대로 화석같이 삶이 굳어질 것만 같았다. 방치할 순 없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했으므로. 온 신경을 곧추세우고 살 길을 모색했고, 뭘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뭘 하지 말아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회사를 관뒀고
그리고 런던으로 떠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야 내 삶이 굴러가기 시작한 기분이다. 굴렁굴렁. 기분이 묘하다.
나는 여기 런던에 있다.